`국회 위의 시민단체` 국정현안 쥐락펴락

  • 입력 2004년 2월 10일 18시 52분


이익단체와 시민단체의 압력도 국정 표류에 한몫하고 있다. 총선을 두 달여 앞두고 현역 국회의원들이 시민단체 등의 낙천·낙선운동을 의식하는 바람에 시급한 국정현안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9일 국회 비준이 무산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과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이라크 추가파병안이 대표적인 사례다.

시민단체들은 ‘10인 10색’ 식으로 자신들의 잣대로 의원들의 정책 활동을 심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 전체의 이익을 망각한 이익단체들의 무리한 압력과 이에 휘둘리는 의원들을 동시에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눈치 보는 의원, 표류하는 국정=9일 FTA 비준이 무산된 이유는 표결 방식 때문. 농촌지역구 출신 의원들은 누가 어떻게 투표했는지 알 수 있도록 전자투표를 하자고 주장한 반면 FTA 비준에 찬성하는 도시 의원들은 투표 결과가 공개되는 것을 꺼려 이에 반대했다.

이런 논란은 농민단체들이 “비준 찬성 의원을 총선 때 응징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데서 비롯된 것. 이날 서울 여의도에서 집회를 연 전국농민연대는 집회 내내 “통과에 찬성하는 의원은 지역구까지 쫓아가서 낙선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라크 추가파병 동의안은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행동’ 등 시민단체가 파병 동의 의원에 대해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는 가운데 9일 아예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또 총선환경연대는 4일 “환경단체는 국가 정책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한 열린우리당 강봉균(康奉均) 의원과 새만금 간척사업을 찬성한 민주당 김태식(金台植) 의원, 원자력발전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핵 발전 중심 에너지 정책을 추진한 한나라당 맹형규(孟亨奎) 의원을 낙천대상으로 선정했다.

총선여성연대도 같은 날 호주제 폐지에 적극 반대했다는 이유로 의원 7명을 낙천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들 정책은 모두 어느 방향이 옳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던 민감한 사안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솔직히 표를 얻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시민단체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면서 “괜히 시민단체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고 정책과 관련해 튀지 말자는 것이 요즘 의원들 분위기”라고 말했다.

▽전문가 진단=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林玄鎭) 교수는 “정치권이 제 역할을 다하고 의원들이 소신 있게 표결했다면 FTA 비준이 무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시민단체가 ‘소수의 목소리’를 너무 강하게 대변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강철희(姜哲熙) 교수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을 지낸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는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균형적인 시각과 책임의식이 요구된다”며 “치우친 사고방식으로 정책을 재단하고 낙선운동을 벌인다면 결과적으로 국정 운영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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