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명 "나는 왜 청문회 출석을 거부했는가" 전문

  • 입력 2004년 2월 11일 17시 52분


법을 어긴 경험이라고는 젊었을 때 통행금지 시간을 위반한 것과 무심결에 저지른 교통법규 위반이 전부인 내가 이제 자신의 판단으로 법을 어기고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국회 법사위는 2월12일과 13일에 열리는 청문회에 나를 증인으로 채택했고 나는 못 나가기 때문에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 및 제15조를 위반하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청문회 증인으로 나오라는데 못나가겠다고 하니 저런 오만한 인간이 다 있나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날 불러내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는 뭘 믿고 저런 간 큰 짓을 하느냐고 노발대발 할 것이다.

믿는 것은 내 소신밖에 없다. 내 소신이 청문회 출석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우는 놈도 속이 있어서 운다고 한다. 하물며 법을 어기는 놈이 왜 이유가 없겠는가.

제일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이번 청문회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왜 청문회를 하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대선자금에 관한 청문회라고 한다.

좋다. 해야 할 청문회면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공감을 하고 국민들이 상식적으로 이해를 하는가.

솔직히 말해 불법 대선 경선 자금에 관해서 어느 정당 어느 정치인인들 자유스러울 수가 있으랴만, 그러나 특히 한나라당의 경우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입에 피가 나도록 꽉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청문회를 하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선행조건이다.

우선 '지하주차장 차떼기 작전'의 주역인 한나라당의 최돈웅 의원과 김영일 의원, 그리고 이회창 후보의 법률고문이며 '차떼기'로 전국적 인물이 된 서정우 변호사, 하수인의 불과 할지도 모르지만 이재현 재정국장 등을 증인으로 채택해 놓은 다음에 청문회를 하자고 해야 한다.

"자! 우리가 '차떼기'를 한 것은 잘못이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증인으로 채택했소이다. 그러나 당신들한테도 비리가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으니 증인으로 나오시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된다. 욕을 안 먹는다. 헌데 아무리 강철심장이라 해도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입을 씻고 남들만 나오라고 하니 벼룩이도 체면이 있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란 생각이 든다.

더더구나 기가 막히고 말이 안나오는 것은 지금 한창 대선자금에 대해 수사를 잘 하고 있는 검찰을 불러내 따지겠다는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과 관련해 굴비 두름처럼 줄줄이 엮여 쇠고랑을 찼고 지금도 조사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이 검찰을 청문하겠다는 것은 도둑이 매를 드는 형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로 적반하장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내노라 하는 율사들이 있다.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린가. 입은 뒀다가 어디다 써먹을 것이며 말은 아꼈다가 뭘 할 것인가. "내 방귀는 구리지 않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내 당의 일이라 하더라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인데 어린애도 납득하지 못할 일을 어떻게 태연하게 하고 있단 말인가.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은 것이 양심이다. 양심을 외면하는 것은 자연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참으로 민망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청문회 불출석 이유서'를 국회 법사위원장 앞으로 냈다.

국회 법사위원회 위원장님 귀하

본인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10조 및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국회 법사위 청문회에 출석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다음과 같은 사유로 증인으로 출석하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첫째 이번 국정조사는 대선자금의 실체규명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차떼기 당'으로 낙인찍힌 한나라당과 총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지지율이 날로 하락하고 있는 민주당이 이를 모면해 보기 위해 정치적인 이벤트를 만들어서 국민들의 시선을 끌어 보려는 구태 정치극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청문회는 적어도 국민적 공감과 상식에 기초해서 열려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청문회가 진실로 대선자금에 대한 실체적 규명을 위한 것이라면 한나라당이 자행한 반도덕적 반정치적 반민주적 범죄인 '차떼기'의 주역인 최돈웅 의원을 비롯해서 김영일 의원과 서정우 이재현 등 '차떼기'에 관련된 인물들이 반드시 출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중 한사람도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은 이런 청문회에 나간다는 것은 국민정서에도 반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라고 믿습니다.

셋째 본인은 이미 작년 국정감사에서 충분히 증언을 한 바 있고 이틀간에 걸친 대검중앙수사부의 강도 높은 참고인 조사에서도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한 사안인데도 국회 상임위가 또다시 본인에 대해 증인 출석을 요구하는 것은 국회의 직권남용이며 일사부재리의 기본정신에도 반하고 본인의 인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고 할 것입니다.

넷째 지금 검찰은 대선자금의 실체 규명을 위하여 온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수사를 하고 있고, 이른바 실세측근이라는 사람들이 구속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청문회를 할 것이 아니라 검찰수사에 적극협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적 의혹이 남아 있다면 본인 스스로 국회의 진상규명에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다섯째 현행 국회에서의 증언 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5조1항, 제3항에 의하면 국회가 증인에게 출석요구를 할 때는 미리 신문할 요지를 첨부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도, 본인에 대한 출석 요구서에는 단지 '경선 대선자료 관련'과 '불법 대선자금 및 장수천 빚 면제 관련'이라고만 되어있어 증인의 방어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절차상 부적법 합니다. 끝으로 본인은 청문회에 출석치 못함을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2004년 2월 11일

이기명

청문회라고 하면 국가 이익에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글자 그대로 듣고 묻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런데 당신의 대답 좀 들어 보자. 그렇게 해서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흑백이 가려지고 잘 잘못이 밝혀지고 그 결과를 국민들이 소상이 알게 되어 정치인에 대한 신뢰도 깊어지고 결국 정치발전에 공헌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인지 이땅의 청문회는 남의 말은 듣지는 않고 야단만 친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되지도 않은 것을 사실인 듯 과장해 장황하게 늘어놓고 증인이 대답 좀 하려면 간단히 하라고 욱박 지른다.

'네!, 아니오!'라고만 대답 하라니 성인군자인들 청문회에 나가려고 하겠는가. 답변은 증인의 당연한 권리다.

작년에 체험했던 국정감사 경험이 떠오른다. 한나라당의 이한구 의원이 밑도 끝도 없이 나한테 시비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의 문화특보를 하느냐!"

맑은 하늘에 벼락 맞을 소리다. 문화특보라니. 더구나 문화특보와 국감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가 똑바로 좀 알라고 핀잔을 주자 어물어물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한나라당의 김정부 의원은 더 기가 막힌데 느닷없이 내가 120억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느닷없는 돈 벼락인가. 하도 기가 막혀 추궁을 하니까 언론에 나왔단다. 어느 언론이냐고 다그치니 나중에 알려 주겠단다.

며칠을 기다려도 꿩 구워먹은 소식이기에 계속 채근을 하니 근거라고 보내 준 게 순 엉터리다. <시사저널>에 났다면서 보낸 기사를 내가 다시 조사해 보니 <주간동아>에 난 것이다. 시사저널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도 김정부 의원은 할 말이 없을 뻔 했다.

일부의원들이 국정감사에 나와서 발언하는 양식과 수준이 이 정도라면 청문회인들 별수가 있으랴. 시채말로 뻔할 뻔자라는 게 내 인식이다.

이른바 저격수라고 하는 정치인이 있다. 한 때 언론은 이신범 전의원을 비롯해서 김문수·이재오 의원들을 저격수라고 했고, 요즘은 선수교체를 했는지 홍준표·김경재 의원을 저격수라고 한다.

홍준표 의원은 자신이 폭로한 1300억 CD가 위조된 것이라고 해서 난감해 하고, 김경재 의원은 공개석상에서 열린우리당을 "싸가지 없는 잡것"이라고 해서 방송이 크게 보도했다. 사람이 화가 나면 무슨 소린들 못하랴만, 적어도 국민의 대표라면 말의 선택은 해야한다. 천냥 빚은 못 갚아도 손해 날 말을 왜 하는가.

이번 청문회에도 면책특권이라는 갑옷을 입은 채 진실 여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물 불 가리지 않는 폭로의 칼춤이 펼쳐질 것이고, 그 칼날 아래 변명의 기회도 못 얻은 채 쓰러질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6.25 전쟁을 겪은 나로서도 용기가 나질 않는다.

누구라면 다 아는 언론계의 친구와 쟁쟁한 경력의 반듯한 법조인이 조언을 했다. 이번 청문회에 나가서 할 말 좀 시원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나도 모욕 당하면 참지 못하고 험한 말을 할 것이고 결국 국회모독죄로 고발이 될 것이니, 차라리 나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청문회에서 남편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 죄 없는 아내가 또 병이 날까 겁이 난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현 대통령의 전 후원회장이다. 그러니 대통령 편인 것은 틀림없고, 또한 열린우리당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글도 편향적이라고 나무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나를 청문회에 부른 이유일 것이다.

증인석에 나를 세우고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독한 질문을 하고, 내가 한마디 말실수라도 하면 일부 언론은 대서특필 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 말씀. 지금 세상은 전처럼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서로 충돌하는 이해가 있기 마련인데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은 상식이라는 재판관에게 맡기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해결을 하면 충돌이 없다. 상식이란 것이 바로 보통사람들의 보편적 판단 기준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도 감정적 대응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자꾸만 꼬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탄핵이 뭐고 총선 거부는 또 무엇인가.

왜 지지율이 하락하는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싶으면 특정지역에 가서 군중집회를 열고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던 한나라당을 천하의 몹쓸 집단으로 매도하던 민주당이 쪼르르 광주에 가서 군중집회를 연 것은 한나라당의 지역감정 조장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지역감정으로 한이 매치고 매친 민주당이 이래서 되는건가.

왜 정치를 국민들이 매도하고 정치인들은 존경대상에서 꼴찌를 하는지 모르는가. 상식을 외면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실정법과 양심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양심법을 어겼다고법률적 처벌은 받지 않지만 문제는 자신이 용서를 하느냐는 것이다.

양심을 외면하면 고통이 따른다. 그 고통을 외면하면 끝이다. 나라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청문회가 아니다. 실종된 상식의 부활이고 미움이 없는 정치다. 상식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세상을 원한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치인의 몫이고, 우리 모두의 몫이고,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 줄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 - - - - - - -덧 붙이는 글- - - - - - - - -

태산이 크게 울고 요동을 쳤는데 쥐 한마리 나타난 게 없다. 청문회는 먹을 것 없는 말의 잔치다. 사실도 아닌 의혹만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비록 인기없는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명예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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