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불체포-면책]<上>누구를 위한 특권인가

  • 입력 2004년 2월 26일 18시 02분


‘특권’을 지키기 위한 방패를 연상케 하는 국회 정문.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의 남용으로 16대 국회는 어떠한 비리도 용인되는 성역이 돼 버렸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특권’을 지키기 위한 방패를 연상케 하는 국회 정문.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의 남용으로 16대 국회는 어떠한 비리도 용인되는 성역이 돼 버렸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002년 7월 25일 미국 하원 본회의장

오하이오 출신으로 9선의 중진인 제임스 트래피컨트 의원이 연단에서 간곡한 표정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뇌물수수와 탈세 등 10가지 혐의로 검찰로부터 7년형을 구형받은 상태. 미 하원은 본회의를 열고 그의 마지막 ‘소명’을 들은 뒤 제명 찬반투표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나는 선거로 뽑힌 국민의 대표입니다. 동료 의원들이 나를 제명할 자격이 없으며 제명하지도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 몇 명이라도 나를 쫓아내는 쪽으로 투표를 한다면 마음이 무척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무참히 짓밟혔다. 투표 결과는 420 대 1로 단 한 명만이 제명을 반대했다.

조엘 해프리 하원 윤리위원장은 “동료 의원을 심판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국민의 대표가 국민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고 단호히 말했다. 동료 의원의 비리 행위에 대응하는 선진국의 태도는 이처럼 단호하다.

#2003년 12월 30일 국회 본회의장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국회의원 7명의 체포동의안에 대한 표결이 실시됐다. 그러나 결과는 압도적인 표차로 모두 부결됐다. 구속을 면한 해당 의원 주위에는 동료 선량들이 모여들어 악수를 했고 “축하한다”고 격려까지 했다.

이날 체포동의안 찬성표는 30∼40표에 그쳤고, 반대표는 많게는 198표까지 나왔다. 여야 의원 구분 없이 모두 합심해 동료 감싸기에 앞장선 것.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은 국회의 행정부 견제라는 국회 본연의 기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직 국민과 공익을 위해 쓰여야 하는 국회의원의 권한.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개인 비리를 저지르고도 이러한 특권을 남용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불체포특권 남용=최근 들어 불체포특권의 남용이 심해지고 있는 추세다.

이른바 ‘방탄국회’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5대 국회 때(1996∼2000년)의 일이다.

대한변협에 따르면 당시 국회는 12건의 체포동의안을 모두 부결 또는 폐기시켰다. 16대(2000∼2004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11건의 체포동의안이 모두 부결 또는 폐기됐다.

지난 8년간 처리되지 못한 체포동의안은 23건이며 가결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반면 제헌국회부터 14대 국회까지는 가결(8건)이 부결(7건)보다 많았다. 국회의원의 ‘제 식구 감싸기’가 최근 8년 동안 절정을 이룬 셈이다.

체포동의를 거부한 명분도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제헌국회 이후 처리되지 못한 체포동의안 30건 중 절반인 15건이 뇌물 혐의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여기에 횡령(3건)과 정치자금법 위반(3건)까지 합하면 ‘부정한 돈’에 관한 혐의가 21건으로 대부분이었다.

▽면책특권 폐해=과거에는 정치권에서만 치고받던 면책특권의 폐해가 최근에는 일반 국민과 기업으로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이달 초 민주당 장전형(張全亨) 부대변인은 대통령 사돈 민경찬(閔景燦)씨의 거액 펀드 모금 사건과 관련해 “사채업자 김○○이 민경찬의 자금모집책”이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사채업자가 아니라 의료기기 납품업자로 밝혀졌으며, 오히려 민씨로부터 사기를 당한 피해자로 드러났다.

김씨는 기자에게 “싸우려면 정치인들끼리 싸우지 왜 애꿎은 국민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괴롭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장 부대변인조차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씨의 혐의에 대해 확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의혹이 있으니 철저히 수사를 해보라는 차원으로 실명을 거명한 것”이라며 뒤늦게 발을 뺐다.

국회의원들의 폭로에 직간접적으로 거명된 기업인들도 곤혹스럽다. 전국에 생방송되는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의혹을 폭로한다며 기업과 기업인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초 한 야당의원이 “노무현(盧武鉉) 후보 쪽에 수십억원을 제공했다”고 ‘폭로’하며 거명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일단 국회의원이 공개발언을 해버리면 아무리 근거가 없더라도 기업에는 치명타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국회의원의 막강한 권한이 두려워 소송을 걸기도 어렵고,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하소연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본보 '특권제한' 설문 의원들 반응▼

국회의원 특권 제한에 관한 본보의 설문조사에 참여한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책임 없는 특권’을 비난하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극히 예외적으로 행사되어야 할 불체포특권이 남용되고 개인 비리를 저지른 국회의원까지 최소한의 국민적 공감대도 없이 ‘방탄국회’의 장막 뒤로 숨겨주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하는 의원이 적지 않았다.

국민의 부정적 시각을 의식한 듯 일부 의원들은 “국회의원으로서 창피하게 생각한다” “국민 앞에 부끄럽다”며 먼저 사과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의 제한 혹은 현행 유지라는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정당에 상관없이 의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나타냈다.

민주당 장태완(張泰玩) 의원의 경우 “제한은 무슨, 아예 없애자”라며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의 철폐를 강하게 주장했다. 장 의원은 “국회의원도 일반사람이나 똑같이 실정법대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법 제도에 대한 수정보다는 이를 운영하는 국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의원도 적지 않았다.

한나라당 이완구(李完九) 의원은 “일시적으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악용됐다고 해서 헌법의 기본정신을 훼손하면 안 된다”며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양승부(梁承富) 의원도 “불체포특권 등의 법률적 취지는 옳지만 악용의 소지도 있는 만큼 국회의원들 스스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천정배(千正培) 의원은 “헌법을 바꾸거나 죄명을 중심으로 법을 고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며 “국회법에서 불체포특권 등을 처리하는 절차를 바꾸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의원은 체포동의안 부결이 국회의원의 정당한 권리행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나라당 박희태(朴熺太) 의원 등은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국회의원 각자의 소신에 따른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말했다.

민주당 황창주(黃昌柱) 의원은 불체포특권의 유지를 주장하며 “굳이 국회 회기가 아니더라도 체포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16대 국회는 2000년 6월 5일 개원 이후 올 1월 말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회기 중’ 이었다.

한편 9일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의원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발의해 ‘방탄국회’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나라당 박종희(朴鍾熙) 의원 등 31명은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에 대해 엇갈린 입장을 보였다.

31명의 발의자 중 본보와 통화가 성사된 13명의 의원 중 박종희 의원 등 9명은 불체포특권은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한나라당 심재철(沈在哲) 의원 등 4명은 제한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학자들은 “법과 제도보다는 의원들의 기본 자질이 문제”라며 특권 제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김선택(金善擇) 고려대 법대 교수는 “법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이라며 “결국은 국회의원들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영은(朱榮殷) 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국회의원들이 면책특권 등을 남용해 온 것이 사실”이라며 “발언권 제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고의적으로 허위사실을 폭로하거나 이로써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는 반드시 제한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법 절차 말고 감정적으로 이야기하면 할 말이 더 많지만…”이라고 말하는 등 국회의원들의 행태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정양환기자 ray@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