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함인희/‘새판의 함정’ 경계해야

  • 입력 2004년 3월 2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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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살적 예측(suicidal expectation)’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접했다. 학자들의 예측 행위란 어느 방향으로 가든 대개는 어긋날 운명을 타고 났음을 풍자하는 표현이었다.

만일 어떤 경제학자가 올해 경제성장률이 3% 수준에 머물 것이라 예측했다고 치자. 내수 부진 및 카드채 부실 심화가 저성장의 주요인이라고 했다 치자.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경제성장 수치가 3%를 훨씬 웃도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 경제학자의 예측은 물론 과오로 판명나게 될 것이다.

▼정권 바뀔때마다 불안한 새판짜기 ▼

한데 흥미로운 건 명백한 판단착오와는 달리 그 경제학자의 진단이 옳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측이 실패하고 마는 역설적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곧 그가 제시한 전제조건에 ‘정책개입’이 이루어짐으로써 내수를 진작시키고 카드채 부실을 정상화하는 데 성공해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예측 행위의 운명은 빗나가면 빗나가는 대로, 적중하면 적중하는 대로 최종 결과는 예측자의 목소리를 뒤엎는다는 점에서 ‘자살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된 것이다.

명백한 과오는 흔히 정보 부족 내지 정보 왜곡으로부터 파생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자 개인의 ‘희망적 해석(wishful thinking)’이 합리적 판단 능력을 압도함으로써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남북관계 진전 및 북한체제의 변화를 둘러싼 다양한 전망이 부단히 기각되어 온 과정은 이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보다 미묘한 예측 불발상황은 실제로 경제 및 복지 관련 정책을 둘러싸고 서구 선진국에서 자주 목격되어 왔다. 한데 이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한편으론 이론가와 정책입안자 사이의 묘한 경쟁관계 하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이론가의 입지에 동정이 가기도 하나, 다른 한편으론 정확한 정보에 입각한 이론가의 통찰력이야말로 유효한 정책의 수립에 핵심적 기능을 담당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예측 행위가 설혹 자살적 운명을 타고 났다 해도 학자의 임무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정확한 현실 진단을 토대로 거짓 없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학자들의 예측을 자살적으로 몰고 가는 제3의 변수가 있는 듯하다. 사회 지도층이 바뀔 때마다 표현을 달리 하며 반복되어 온 ‘새 술은 새 부대에’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새판짜기’ 쯤에 해당되겠다.

새로운 룰의 등장은 기존 룰의 권위를 불허하고 선례에 담긴 노하우를 부인하기에, 예측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굳이 전문가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거니와 누구라도 전문가연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마련이다. 더더욱 새로운 룰은 그것이 정착되기까지는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기보다 사람 따라 움직일 확률이 높기에, 상황 전개의 가변성 및 임의성을 배가시킴으로써 예측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현실진단 가능한 상황 기대 ▼

이 대목에서 기억해야 할 경고가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포착되지 않는 위험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사회일수록, 급격하고도 농축된 변화와 혼돈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일수록, 실은 위험의 원인을 포착하고 변화의 방향성을 진단함에 있어 전문가들의 ‘성찰적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조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는 우리 사회의 위험수위를 그 누가 감히 논할 수 있겠는가.

이제 4·15총선을 불과 한 달 보름여 앞두고 각계각층 전문가들의 설왕설래가 분분하다. 차라리 예측 결과가 자살적이어도 좋으니 현재의 정황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이길 희망한다. ‘새판’을 앞세운 교란에 휩쓸리는 건 훨씬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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