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3·1만세가 아니다 ▼
광화문에 동아일보가 터를 잡은 것은 80년 전인 1924년 3월. 기미년의 의기와 감격이 아직 생생하던 때였다. 10년 공기(工期)가 거의 끝나, 아시아 최대의 돔을 자랑하는 총독부 청사가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당시 민족의 원부(怨府)인 총독부 코앞에 동아일보 사옥을 지으려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총독부의 해코지를 우려해서였다. 그에 대한 인촌(仁村) 선생의 결의가 오늘에도 새롭다.
“언론에 있어서는 피해서 싸우는 것보다 맞서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고, 우리 땅에서 우리가 피할 것은 없소.”
85년 전 3·1만세는 단숨에 온 겨레를 일깨워 일제의 무단통치를 흔들었다. 이듬해 탄생한 동아일보도 3·1만세의 선물이었다. 상하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 동아일보를 ‘어두운 길에 한 자루 촛불’ ‘쓰러진 수풀에 한 그루 소나무’라고 묘사한 것엔 그 시절 민족의 갈망이 담겨 있다. 그 독립신문도 식민지 언론의 고충과 한계를 모를 리 없었지만 이를 탓하진 않았다. 너나없이 힘든 시대였음을 헤아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했던가. 굴곡 많은 현대사에서 3·1절 또한 시대에 따라 여러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영원히 굴절되거나 퇴색해서는 안 되는 얼과 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민족적 일체감이라면, 보-혁(保-革)이 각각 패거리를 지어 갈라진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3·1만세일 수 없다. 이는 바로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는 독립선언문의 공약 3장 제1조에도 어긋난다.
해방공간에나 있었던 그런 일이 요즘 재발한 것을 가볍게 지나쳐선 안 된다. 우리사회의 갈등지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경고인 때문이다. 그 중심엔 닫힌 정치가 있다. 같은 편이면 무조건 껴안고 비비면서, 다른 편이면 아무렇게나 내치고 헐뜯는 정치가 바로 3·1정신 오염과 훼손의 주범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세(時勢)에 따라 지하철 갈아타듯 이리저리 편을 바꾸는 정치인들이 과연 역사를 논할 자격이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의 3·1절 즉석 기념사엔 우리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모처럼의 고뇌가 엿보인다. 3·1운동의 대의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과제를 ‘무겁게’ 얘기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고 차이를 극복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로서 모든 문제를 풀어가자”고 호소한 것은 예전과는 다른 톤이었다.
▼즉석연설, 즉흥이 아니라면 ▼
그는 또 식민지시대와 해방공간에서의 반목과 대립, 고통과 상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용서와 화해로 치유하고 극복하자고 당부해 박수를 받았다. 이번엔 원론으로 시종한 사전원고보다는 그의 체온이 실린 즉석연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현 정권의 업적 나열을 생략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즉석연설이 즉흥연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연설 직전 원고를 물리칠 정도로 참모들이 대통령의 의중에 어둡다면 문제가 있다. 즉석연설이 국민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지고 국정에 확실하게 투영되기를 원한다면, 노 대통령은 먼저 주변 사람들의 가슴부터 열어야 한다. 그래서 내년에는 3·1절만이라도 전 국민이 한목소리로 만세를 불렀으면 한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