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만난 멕시코 내무부의 정무국장 한 분은 한국의 현 정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정치자금 수사가 그토록 전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야당 의원들은 물론 현직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까지 검찰에서 수사 받고 기소되고 있다는 이야기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온갖 묵은 비리와 정치자금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국의 정치자금 수사가 그들에겐 경이였다. 멕시코의 지식인들은 한국 시민단체의 낙선·당선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그 힘을 내심 부러워하면서.
▼야당인사 뇌물수수 잇따라 공개▼
2월 말에 멕시코에 도착하니 ‘비디오 정국’이 시작됐다. 녹색당의 상원의원으로, 당수직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한 청년 정치인이 외국인투자자에게 카리브 연안의 휴양지 개발이권을 주는 대가로 200만달러를 요구한 대화 내용이 비디오로 공개됐다. 소위 ‘녹색당 아기(니뇨 베르데)’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곧 이어 멕시코시티의 재무국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거액의 도박을 하는 모습이 비디오로 공개됐다. 그가 출처 불명의 돈으로 구입한 아파트가 다섯 채였다. 그 국장은 중도좌파 정당인 민주혁명당 소속인 로페스 오브라도르 시장의 오른팔이었다. 청렴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오브라도르 시장에겐 악재였다. 이 사건 전만 해도 그는 2006년 대선 가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85%의 지지도를 누리고 있었다. 사건 다음날 멕시코시티 간부가 건설업자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달러 뭉치가 가득 든 가방을 건네받는 모습이 또 비디오로 공개됐다.
세 건의 비디오 사건들은 모두 야당과 관련된 것이기에 야당은 정부의 공작정치라고 공세를 폈다. 하지만 야당 정치인들의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얼마 전까지 정국의 논란은 지난 대선의 불법 선거자금 문제였다. 멕시코의 공당들은 지지율 비례로 엄청난 정부보조금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게 모자랐던지 민간 부문으로부터 상당한 돈을 끌어 썼고 이를 선관위 보고에서 누락시켰다. 페멕스게이트, ‘폭스의 친구들’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사건을 조사했지만 불법을 행한 당사자 누구 하나 감옥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부인이 운영하는 ‘함께 가는 멕시코 재단’의 기금 출처에 대한 논란도 계속됐다. 대통령 부인 마르타 사아군은 현재 여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차기 대선에 대한 꿈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통령의 영향력을 이용해 재벌들로부터 기금을 갹출해 각종 자선사업을 벌였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처사였다. 여론의 압박에 밀려 그는 “이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 꿈을 접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단절 갈길 먼 폭스 대통령▼
제도혁명당 71년간의 부패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정부예산 바깥에서 살면 불행한 인생”이란 말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6년 단임제의 마지막 해는 모두가 국부를 포식하고 약탈하는 한 해였다. 정경유착 규모도 상상을 초월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 시절, 당정분리를 위해 제도혁명당이 기금 모금에 나선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된 30대 재벌은 각자 2500만달러를 요구받았다. 외신에 노출돼 성사되진 못했지만, 한 끼 식사 값이 당시 미국 대선비용의 12배였다. 이 사건은 멕시코 국내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멕시코에서도 정치자금에 관한 수많은 게이트, 비디오 사건들이 언론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비센테 폭스 대통령 정부도 정보공개법과 정보공개청(IFAI)을 통해 투명성 제고에 노력했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속도는 더디다. 제도혁명당이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과거는 여전히 현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