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둔 ‘편 가르기’ ▼
정국이 ‘증오의 정치’로 치닫고 있다. 야당은 노골적으로 이번 총선이 ‘친노(親盧) 대 반노(反盧)’의 대결이라며 각을 세우고 있다. 여당은 여당대로 ‘민주 대 반(反)민주’의 대결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선거판을 ‘내 편’과 ‘네 편’, 혹은 ‘선’과 ‘악’의 이분구도로 만들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부풀려 표를 얻겠다는 전략이다.
증오의 속성은 편을 가르며 공격적이다. 이제 여당과 야당은 증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유권자를 향해 연방 ‘증오의 바이러스’를 뿌려 대고 있다. 가뜩이나 양극화되어 서로 으르렁대는 사회가 더 요동칠 수밖에 없다. 설령 어느 한편이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한다 해도 반대 세력과 화해를 기대하긴 어렵다. 증오에 익숙한 승자는 확보된 권력을 이용해 반대편을 향해 복수의 화살을 겨눌 것이다.
반대 세력이라고 앞으로 다수당이 되거나 대통령을 내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는다. 증오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는 한 종국에는 서로를 파괴할 것이다. 동양에서 선과 악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여백을 남겨 둔 이유가 이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려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신화처럼 여겨 온 민주주의에도 결점이 있다. 정치적 견해가 자유롭게 토론되지 못하고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이 남발되고 그것이 다수의 지지로 선택되면 민주주의의 실패가 발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한 정치제도다. 유권자 다수의 동의가 얻어지지 않을 때 정치가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게 합리적인 설득보다 시간이 절약되고 효과적이다. ‘증오의 정치’의 유혹은 여기서 비롯된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념 대립과 이익집단의 갈등이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건전한 공론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인터넷은 살벌한 싸움판이 되고 말았고, 민주사회에 필수적인 토론문화는 좀처럼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위협 요인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 구도는 언제나 모순과 불합리를 동반한다. ‘친노 대 반노’나 ‘민주 대 반민주’의 구호도 그렇다. 야당이 총선을 현직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심판하는 자리로 몰아가는 것이나, 여당이 상대방 정당을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 모두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를 드러낸다.
총선은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자리이지, ‘친노’ ‘반노’로 편을 가르는 자리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 국회 다수당이 되겠다는 여당이 ‘탄핵’이라는 국회 권한의 행사를 반민주 행위로 몰아붙이는 것도 자기모순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가야 ▼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진통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절실한 것은 흥분이나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로 판단하는 국민의 자세다. 유권자들은 일단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증오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증오의 정치’를 척결할 사람은 정치인 이전에 유권자들이다. 유권자의 성숙한 의식이 없으면 정치인에 대한 올바른 심판이 불가능하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갈등과 분열을 부르는 서양의 선악 구도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생을 모색하는 동양적인 성찰에서 민주주의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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