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현희/너무 허술한 혈액관리

  • 입력 2004년 4월 1일 19시 00분


혈액은 오직 인체로부터만 얻을 수 있을 뿐 인공적으로 제조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구라도 출혈이 심하면 선택의 여지 없이 수혈받아야 하므로 혈액은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공공재다. 오염된 혈액이 환자에게 공급되면 혈액을 매개로 한 질병에 감염되는 치명적 결과가 나올 것이므로 바이러스와 세균에 오염되지 않은 안전한 혈액을 공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감염된 피로 만든 약’문제 심각 ▼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 에이즈나 간염 등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는 부적격 혈액이 수만 건이나 시중에 유통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대한적십자사나 보건 당국이 혈액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감염된 혈액이 수혈이나 혈액제제를 통해 환자에게 투여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대한적십자사 산하의 혈액원들은 헌혈 등으로 확보한 혈액을 처리해 적혈구나 혈소판 성분은 수혈용으로 병원에 공급하고 혈장 성분은 따로 분류해 제약회사로 보낸다. 제약회사는 이를 알부민 등의 혈액제제로 만들어 불특정 다수의 환자에게 공급한다.

감염된 혈액의 수혈로 환자가 감염되는 것도 물론 중대한 문제지만, 이 경우는 피해가 수혈받은 환자 한두 명에 국한된다. 그러나 혈장의 경우는, 만에 하나, 피해가 생기면 그 여파가 광범위할 수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한적십자사 혈장분획센터는 전국 16개 혈액원에서 채혈된 혈액에서 혈장을 모아 큰 통에 섞어 알부민이나 글로불린 등의 성분별로 분류하는 분획공정을 거친 뒤 이를 제약회사로 보낸다. 전국의 헌혈자 수백, 수천명의 혈액이 약 1000L 용량의 큰 통에 혼합되는데, 만일 여기에 에이즈나 간염에 감염된 혈액이 단 한 건만 포함돼도 혈액 전체가 감염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원료로 혈액제제를 만들 경우, 비록 불활성화 공정을 거친다고는 하지만 위험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에 대해 보건 당국과 제약사측은 설혹 원료 혈액이 감염됐어도 불활성화 공정을 거치면 혈액제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안전하다면 지난해 에이즈에 감염된 헌혈자 1명의 혈액을 투여 받은 수술 환자 2명이 모두 에이즈에 감염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일 헌혈자의 혈장 성분이 들어간 혈액제제 수천병 전부를 폐기토록 한 이유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수만분의 1의 경우라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에 감사원이 지적한 대한적십자사의 혈액사고 현황에 따르면 에이즈 감염 의심 혈액임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유통된 혈액은 모두 90여건에 이른다. 그렇다면 90∼180명의 환자에게 그 혈액이 수혈됐을 가능성이 있고, 그 혈액의 혈장 성분으로 수만병의 의약품이 만들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감염 의심 혈액을 수혈 받은 환자들을 추적해 그 환자 및 배우자 등 제3의 감염 우려자에 대해 채혈을 통해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문제 혈액의 혈장 성분으로 만든 의약품의 유통 경로 등을 파악하는 역학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은 유감이다.

▼제3의 감염’ 줄일 방법 찾아야 ▼

더욱이 이번 감사원의 감사는 혈액 유통이 부적격하게 이뤄졌다고 판단되는 7만여건 전체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그중 일부인 2000여건만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것도 부실 혈액관리의 직접 당사자인 대한적십자사의 자체조사 자료를 검토해 도출한 결론이다. 드러나지 않은 혈액 유통사고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정부는 감염이 의심되는 혈액의 수혈자와 그 혈장으로 만든 의약품의 유통실태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상시관리체제를 갖추고, 문제가 생기면 즉각 철저한 역학조사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제3의 선의의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전현희 변호사·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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