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선거에서 특정 정당의 선대위원장이 선거운동 기간에 사퇴를 한 적도, 단식에 돌입한 적도 없다. 논리를 앞세워 상대를 제압하거나 급할 경우 폭로전이나 남북관계를 이용해 뒤집기를 시도했던 것이 과거 선거에서의 정형화된 위기 돌파 방식이었다. 정 의장의 단식은 위기의식을 유권자들에게 신속히 전파하기 위한 ‘감성적 쇼크’라는 데 이견이 없다.
감성 정치 경쟁은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와 민주당 추미애(秋美愛) 선거대책위원장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불이 붙었다.
박 대표는 팔리지 않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의 번듯한 당사 건물을 그대로 두고 천막 및 컨테이너로 당사를 옮겼다.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국회를 두고 굳이 비참한 천막과 컨테이너에서 지내는 것은 ‘과거에 대한 참회’의 이미지를 강조해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하겠다는 것. 또 박 대표가 지난달 30일 총선 TV 방송연설 도중 한나라당 지지를 호소하면서 흘린 눈물도 정치권에 감성 정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당 추 위원장도 ‘3보1배’를 통해 민주당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추 위원장은 3보1배를 마친 다음 날부터 링거 주사를 꽂고, 휠체어를 타고 지원 유세를 강행해 유권자들의 감성 코드를 자극했다.
총선 막바지에 유권자 표심잡기 경쟁이 뜨겁다. 한 총선출마 후보가 13일 장터에서 할머니를 등에 업고 고개를 숙인 채 지지를 당부했다(위). 한 후보의 부인은 이날 화려한 한복차림으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유권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가운데). 한 출마자는 지역의 목욕탕에까지 들어가 등을 밀어주고 손을 맞잡으며 한표를 호소했다. -원대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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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들이 이처럼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톡톡 튀는 ‘이벤트 정치’에 매달리는 것은 그만큼 유권자에게 빨리 먹히면서 정치적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 3김 시대의 텃밭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정치나 개인적 경륜에 근거한 카리스마 정치가 퇴장하면서, 전국적 인기를 가진 대중 정치인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여러 현상 중 하나가 감성 정치인 셈이다.
총선이 감성을 무기로 한 각 정당 지도자들간의 공중전(空中戰) 양상으로 전개되자 총선인지 대선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엄격해진 선거법의 영향으로 총선 후보들의 모습은 실종된 대신 미디어를 통한 중앙당의 이벤트 대결만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거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잣대’로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라크 파병이나 남북관계, 신용불량자, 청년실업, 원자재난 등 주요 국정현안들이 총선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린 것은 바로 감성 정치의 어두운 측면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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