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금강산에서 46년 만에 만났던 둘째 여동생 인옥씨(72)의 생사를 알 길이 없기 때문.
최씨는 “여동생과 헤어질 때 서로 부둥켜안고 신의주특구가 생기면 특구에 이주해 함께 살자고 다짐했는데…”라고 울먹이며 여동생과 함께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만 어루만졌다.
그는 “신의주특구가 생기면 그동안 서울에서 모은 돈을 몽땅 들고 신의주특구에서 사업을 벌여 북의 가족들을 초청하려 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3남3녀 중 셋째인 그는 광복 직후인 1946년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북쪽에 친인척이 누구보다 많다. 형제자매 중에는 여동생만 살아 있지만 조카들은 용천역 근처와 신의주, 자강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 때문에 폭발사고로 아비규환이 된 고향 소식을 신문과 방송으로만 전해 듣고 있는 그는 누구보다도 답답한 심정이다.
광복 직전 용천역 부근에서 3년 동안 포목장사를 했다는 그는 “옛날에는 용천이 소학교와 사립학교 하나씩만 있고 3층 건물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만 시골마을에 불과했다”며 “사진을 보고 다른 곳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최씨 외에도 용천역 근처에 가족이나 친척을 두고 온 실향민들은 답답한 마음에 이북5도청이나 대한적십자사에 문의전화를 해보지만 “방법이 없다”는 말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
지난해 2월 금강산에서 용천에 사는 아들(58)과 여동생(68)을 만났다는 김세곤 할아버지(79·충남 부여군)도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모두 건강한 모습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99년 평양에서 남동생 및 조카들과 상봉했던 김옥선 할머니(83·서울 은평구 녹번동)도 “용천에서 12km 바깥에 살아 안심은 되지만 혹시라도 다쳤을지 몰라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죽기 전에 얼굴이나 다시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이런 사고까지 겹쳐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2월 금강산에서 용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난 이형오 할아버지(74·경기 고양시 일산구)도 “중국 브로커를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하지만 돈이 많이 들고, 사기도 많이 친다고 해서 그만뒀다”고 말했다.
김병서 할아버지(79·경기 의정부시 녹양동)는 “친척 3, 4명이 다행히 사고현장에서 좀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한 뒤 안심했다”면서 “그러나 이번 사고로 그들이 생활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정원수기자 needjung@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정세진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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