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이성형/‘파병 재논의’ 이미 늦었다

  • 입력 2004년 5월 4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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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상황이 점점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팔루자와 나자프에서 일어난 저항과 교전으로 수많은 인명 살상이 발생했다. 연합군 병사들의 포로 고문과 학대가 국제사회에 말썽이 되고 있다.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특별보좌관을 지낸 아서 슐레진저 박사가 말했듯이 이라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베트남’으로 바뀌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애초 개전 사유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도 찾지 못했고,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의 연계도 모두 허구인 것으로 드러났다. ‘자유 이라크?’ 이것이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명분일 것이다.

▼“잘못된 전쟁…처리라도 제대로”▼

하지만 미국 내 반전여론은 의외로 조용하다. 팔루자와 나자프가 1968년 베트콩의 테트 공세와는 다른 모양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을 밀어냈던 수준의 반전 데모는 보이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담은 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사자의 관 행렬이 ABC와 CBS에 노출되고, 포로 학대와 성고문 사진들이 연일 뉴스로 올라오는데도 말이다.

이라크전쟁을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싸움도 현재로선 시들하다. 민주당 존 케리 대통령 후보는 전후처리에 유엔과 유럽 열강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할 뿐이지, 즉각적인 철군 이야기는 전혀 입 밖에 내지 않고 있다. 철군을 말했다간 역풍을 맞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결국 양당의 전후처리 접근 방식은 연두색과 연초록색의 차이만큼 유사하다.

자유주의자들은 ‘엉뚱한 시점, 엉뚱한 장소, 엉뚱한 전쟁’을 비판하지만 이왕지사 전후처리만큼은 매끄럽게 해야 한다는 데 동조한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제럴드 베이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든다. “후세인의 이라크가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이 패주하면 이라크는 (진짜) 위협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주의자들은 베트남전쟁 당시의 주장을 반복한다. 미국이 빠지면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 갈등의 카오스가 도래할 것이고, 아프리카처럼 부족간에 살육과 내전이 일 것이다. 따라서 내외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지만 미국은 리더십과 위신에 상처를 주는 철군 조치를 하기 어렵다. 정책결정 그룹에서는 대체로 전후처리의 대강을 마무리 짓는 시점을 2년 정도로 보기 때문에 설사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한들 큰 변화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서 표결을 통해 파병을 결정했다. 누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명분이 허약한 전쟁터로 보내고 싶겠는가. 시민단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야 의원들은 여러 차례 논란 끝에 파병안에 다수결로 동의했고,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의 협의 아래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택해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자이툰부대의 파병지 선택이 혼선을 겪는 등 파병이 계속 지체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라크 사태가 악화되자 여당의 지도자급 인사가 ‘파병 재론’을 들고 나섰다. 시민단체들도 곧 촛불집회를 재개한다고 한다.

▼정치권 일부 재논의 납득 어려워▼

시민단체의 집회야 의사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공당의 정치인이 상황변화를 이유로 파병 결정을 재론하자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파병을 막으려면 처음부터 공론을 그렇게 모아야 했다. 국회의 결정 이후에 재론 운운한다면 한국 외교의 신뢰감 위기를 심화시킬 따름이다. 이런 신뢰감 위기는 미국의 정권이 바뀐다 해도 쉽게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국익 차원의 파병이라고 해도 최상의 목표는 군인들의 안전이다. 파병부대의 안전을 위해서는 일찌감치 현지의 지역공동체와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복구사업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야 했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너무 꾸물댔다. 이라크 주권 이양시기인 6월 30일이 두 달이 채 안 남았다. 6월 이후면 권력배분을 둘러싸고 종파간, 지역간, 종족간 암투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이런 와중에 파병부대의 신뢰구축 작업은 의외로 힘들어질지 모른다.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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