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의 CI가 단체장의 ‘자기 과시용’ 쯤으로 치부되다 보니 ‘디자인’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엉터리 CI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것은 지자체 CI 바람이 1995년 단체장 직선제 실시 후부터 생겨났다는 사실로도 입증할 수 있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CI가 교체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디자인업계는 지방선거 직후마다 반짝 특수를 누리곤 한다. 여기에 캐릭터 개발을 통해 수익사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벤처의식’도 지자체 CI 바람을 부추겼다.
지자체 CI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체 CI가 인지도 제고를 통해 궁극적으로 ‘매출 증대’를 지향하는 것처럼 지자체 등 공공기관의 CI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목표가 확실해야 제대로 된 CI가 나올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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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 예술대 지상현 교수는 “CI는 조직과 경영 전반을 재정비해 통일된 이미지를 표출하는 작업”이라며 “경영 현황과 조직의 비전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고 나면 디자인의 차별화는 절로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디자인이 중요해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지자체 내에 디자인 부서를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도 있다.
●절반이상 정체성 떨어지고 촌스러워 교체해야
자체 CI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디자인이나 색상 등이 비슷한 사례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남, 경북 김천시, 경남 거제시, 강원 동해시 등의 CI는 공통적으로 빨간 태양을 소재로 삼았다. CI에 산을 활용한 지자체는 서울시, 대구시, 충북, 강원 춘천시 등 10개가 넘는다.
이는 ‘지역 특성을 반영하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지역 내의 산과 강 등을 CI의 소재로 삼는 게 유행했기 때문. 정석원 사장은 “우리나라에 강이나 산을 끼지 않은 지방이 어디 있느냐. 그런 걸 ‘지역 특징’이라고 내세우니 CI가 비슷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색다르다’는 CI는 미적 요소가 결여돼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전통 민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미지를 반영했다는 서울시 마스코트 ‘왕범이’는 1998년 초 선보였으나 지금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화책에나 나올 법한 오리를 형상화한 서울 영등포구 마스코트, 경찰서 파출소마다 걸려 있는 ‘포돌이’ 역시 엉성한 상징물로 지적된다. 지상현 교수는 “포돌이는 선 처리나 얼굴과 몸통 비율 등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캐릭터”라고 잘라 말했다.
지자체 상징물이 눈길을 끌지 못하는 데에는 ‘적은 예산’도 중요 원인이다. 전남지역 한 지자체의 디자인담당 공무원은 “예산을 요청하면 ‘디자인에 무슨 돈이 그렇게 드느냐’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뉴욕 도쿄 홍콩 세련된 이미지 대표적 성공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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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뉴욕시는 1975년 ‘I♥NY’라는 상징물을 개발해 관광산업 등에 적극 활용했다. 그 뒤 ‘I Love New York’이라는 로고송까지 나오는 등 큰 인기를 끌면서 ‘I♥NY’는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을 뜻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일본 도쿄는 모든 이의 요구와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완벽한 도시’라는 개념의 ‘YES! TOKYO’ 상징물을 개발해 이미지 제고에 활용하고 있다.
홍콩의 CI는 영문 이니셜 HK와 용의 모습을 혼합해 동서 융합을 상징한다. 홍콩의 역동성과 속도감이 느껴지며 중국의 상징색(빨강)을 적절히 활용했다는 평이다. 독일의 쾰른 역시 도시의 대표적 건축물인 대성당의 이미지를 도시환경시설부터 관광상품에까지 반영하는, 일관된 CI를 구축해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세련된 지자체 상징물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제주도는 이미 국경을 넘어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를 굳힌 인도네시아의 발리처럼 ‘세계 속의 제주’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국내 지자체 최초로 영문 워드마크를 도입했다. 전남 장성군은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이 장성군 출신의 실존인물이라는 자체 고증을 토대로 1998년 홍길동 캐릭터를 개발해 매년 수천만원의 로열티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현 디자인파크 사장은 “지자체 CI를 개발할 때는 차별성을 찾는 것은 물론 관광 비즈니스 측면까지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 함량미달 CI 왜 많은가
‘높은 분’ 아는 업체 유리 심사위원 비전문가 많아 선정과정 투명공개 급해
지방자치단체가 이미지통합(CI) 캐릭터 엠블럼 포스터 등 디자인 상징물을 만들 때 특정 업체와 수의계약을 맺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 공고를 내고 제안서를 받은 뒤 대학 교수와 디자인 전문가, 시민단체 관계자, 지자체 간부 등이 두루 참가하는 심사를 거쳐 업체를 선정한다.
그러나 정말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학 교수 B씨는 한 지자체의 CI 심사에 참여했다가 ‘왕따’가 된 적이 있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작품을 평가했더니 한 심사위원이 “가만히 있으라”고 눈치를 줬던 것.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단체장과 가까운 업체가 내정돼 있었다”는 게 B씨의 씁쓸한 회고. 디자인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영남권의 한 기초단체는 심사 결과와 다른 업체를 선정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고 전했다.
심사위원회의 구성도 문제다. CI 캐릭터 등은 디자인 영역인데도 비전문가들이 심사위원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 디자인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어 회화 조각 등 순수예술을 전공한 미대 교수를 ‘디자인 전문가’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디자인계의 고질적인 ‘파벌주의’도 불량 디자인의 큰 원인. 같은 대학 출신이나 알고 지내는 업체의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것이 관행이다. 물론 출품회사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지만 작품과 함께 제출되는 해당업체의 실적을 보면 어느 회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특정 업체 봐주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1980년대 ‘형편없는 디자인’으로 지탄받은 보라색 서울시내 버스도 아는 사람끼리 감싸 주고 적당히 넘어가는 파벌주의가 낳은 부작용이라는 얘기다.
송성재 호서대 예술학부 교수는 “디자인업체를 선정할 때 특정 학맥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응모해 채택될 수 있도록 공모와 심사 과정을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디자인업계도 살고 공공디자인 자체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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