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신지호/대북정책 ‘자아분열’ 극복해야

  • 입력 2004년 5월 11일 18시 49분


코멘트
전두환 신군부가 ‘서울의 봄’을 군홧발로 짓밟아 권력을 찬탈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최루탄과 ‘짱돌’의 한판 굿을 벌인 후 지나가는 버스에 몸을 의탁했는데 막노동자로 보이는 두 남자가 낮술의 힘을 빌려 떠들고 있었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됐지 무슨 데모야? 대학생 놈들, 배때기에 기름기가 껴서 저 지랄들이야.”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들은 사회과학 서적에서 만나던 ‘민중’이 아니었다. 한데 그날 이후에도 그러한 이들은 여러 곳에서 목격됐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내 머릿속에서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시간적 격차’라는 ‘동아시아적 현상’으로 정리되었다.

▼산업-민주화 세력 공허한 논쟁▼

20년이 더 지난 오늘,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대북인도주의 지원단체의 활동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어 북한 인권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았다. “인권에도 여러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 동포의 정치적 자유 등 민주주의적 권리보다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생존권 확보를 우선적 가치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일리 있는 얘기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 없는 민주주의’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답한 그가 운동권 투사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학교 다닐 때 왜 그리 세게 데모를 했나. 지금 자네 논리는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창했던 개발독재 논리와 비슷한 걸.” 나의 짓궂은 질문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산업화 세력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적극 거론하는 반면, 민주화 세력은 남북화해 무드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소극적이다. 과거 국내 민주화에 대한 태도와 정반대다. 여기서 우리는 두 세력의 변신에 담겨 있는 일관성의 결여, 심각한 자기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독재를 옹호하던 산업화 세력은 북한 문제에선 주민의 ‘밥’보다 자유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거꾸로 민주화 세력이 김정일 정권의 천인공노할 인권유린을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자기모순이다. 이렇듯 분단구조는 한국사회의 양대 세력을 자아분열증 환자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대북정책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도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람들끼리 티격태격하니 누가 누구를 설복시킬 수 있겠는가.

21세기 선진화 세력의 대북정책은 이 같은 20세기 세력의 자아분열 현상을 완전히 극복한 것이어야 한다. 심혈을 기울여야 할 작업은 의제설정(agenda setting)과 우선순위 설정(priority setting)이다. 그 정답은 ①대량살상무기 문제 해결을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 ②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 ③수령 전체주의 체제의 민주화로 요약할 수 있다. 햇볕정책의 문제점은 민주화를 의제에서 제외시킨 점, 그리고 대량살상무기 문제 해결과 개혁개방의 우선순위를 뒤바꾼 점에 있다.

제2차 북핵 위기의 발생으로 노무현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변신을 꾀했으나 북한 민주화를 주요 의제로 설정하지 않은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이제 우리는 북한 민중의 입장에 더 다가가야 한다.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하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민주화를 염원하는 북한 민중의 눈에는 수령독재 지원세력으로 비칠 뿐이다.

▼沒체제적 통일지상주의 위험▼

또 하나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몰(沒)체제적 통일지상주의의 극복이다. 최근의 한 조사에 의하면 체제에 상관없는 통일에 동의한 응답자가 무려 31.1%나 된다. 과거 반공주의의 폐해가 만들어낸 반동적 현상이다. 그러나 ‘몰체제’가 수구냉전을 극복하는 길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반공은 청산 대상이지만,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 반대는 견결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고(故) 장준하 선생의 외침이 조용히 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국제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