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5월 넷째주

  • 입력 2004년 5월 16일 19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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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20일 제3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투표용지를 전국 6008개 투표구에 배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사진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54년 5월 20일 제3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투표용지를 전국 6008개 투표구에 배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사진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야당지도자 擧皆 당선 忠南北 等 지방은 自由黨 일색▼

內外 耳目을 집중한 가운데서 치열한 角逐戰을 전개하여 오던 五·二十 총선거는 二十日 下午 五時까지 전국 八百四十萬 有權者의 投票를 끝냄으로써 막을 내렸다.

五個條 헌법개정안을 내걸고 이를 통과키겠다는 공약 하에서 立候補한 자유당의 公認候補者가 果然 어떠한 비율의 當選을 보게 될지는 아직 地方報告의 未着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指導權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李甲成 裵恩希 等 간부급 人物이 落選되는 반면에 野黨에서는 申翼熙 金度演을 비롯하여 趙炳玉 金俊淵 尹潽善 趙在千 徐東辰 等 民國黨 지도층과 아울러 鄭成太 郭尙勳 錢鎭漢 等 야당투사들이 당선을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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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서 李大統領이 企圖하는 5개조 改憲은 이번 국회에서도 쉽사리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관측되는 바이다.

<1954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

▼관권 판친 3대총선… 언론들 야당선전에 초점▼

1954년 제3대 총선(5·20선거)의 최대 관심사는 ‘3선개헌’ 문제였다. 52년 대통령직선제를 허용하는 ‘발췌개헌‘으로 재선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53년 말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안을 내놓았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규정을 폐기하고 국무총리제 등 내각제 요소를 폐지하는 5개조의 개헌 문제가 그것.

선거는 ‘개헌 지지’를 내건 자유당의 승리로 끝났다. 경찰관들이 공개적으로 여당지지 발언을 하고 다닐 정도로 관권이 판을 친 선거였다. 전국 203개 선거구에서 자유당은 114석(56.1%)을 얻었고 무소속 68석(35.5%), 민국당 15석(7.4%) 등이었다.

그러나 자유당으로선 ‘만족스러운 승리’가 아니었다. 야당지도부와 투사들이 대거 당선된 데다 전체 득표수에서도 무소속(359만표)이 자유당(275만표)을 상회하는 등 지지가 견고하지 못했다. 더구나 ‘여당의 승리’보다 ‘야당의 선전’에 초점을 맞춘 이 기사에서 보듯 언론이 개헌에 부정적이라는 것도 부담이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선거 직후 무소속과 야당의원 영입공작에 들어가 개헌선인 의석 3분의 2(136석)를 확보하고 54년 11월 27일 개헌안의 국회 처리를 시도했다. 표결 결과는 개헌선에서 1표가 모자란 135표였지만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억지논리를 동원해 개헌안 통과를 선언했다.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 파동이다.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지켜본 영국 더 타임스의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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