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청와대 노래방’

  • 입력 2004년 5월 30일 18시 21분


사람의 애창곡은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과 향후 지향을 반영한다. 동지를 많이 규합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그래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되는 ‘만남’이라는 노래를 애창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종종 측근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주연(酒宴)을 즐겼다. 박정희는 ‘황성옛터’, 전두환은 ‘김삿갓’, 노태우는 ‘베사메무초’, 김영삼과 김대중은 ‘선구자’를 즐겨 불렀다. 청와대에서 한일 수뇌가 ‘가라오케 정상 외교’를 벌인 적도 있었다.

▷엊그제 청와대에서 있었던 열린우리당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및 중앙위원 초청만찬에서 ‘노래자랑’이 벌어졌다고 한다. 26명의 여성 당선자와 중앙위원들이 ‘만남’을 불러 분위기를 띄웠고, 노무현 대통령은 ‘허공’을 불러 앙코르를 받자 자신의 18번인 ‘부산갈매기’를 열창했다고 한다. 박수소리로 행사장이 진동했을 것이다. 참석자들이 특히 의미를 부여한 것은 17대 국회에 들어오게 된 386세대 당선자 30여명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한 사실이다.

▷행사에 참석한 386당선자는 한 인터넷 매체에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그것도 대통령이 함께한 자리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청와대 뜨락을 넘어 한반도 전체에 울려 퍼져 나가고 있었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을. …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고 반정부 과격분자로 몰려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던 그 시절의 그 노래가, 이제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 대한민국의 한복판인 청와대 영빈관에서 울려 퍼지게 될 줄은….”

▷놀라운 것은 신기남 당의장이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부른 일. ‘눈짓 몸짓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날이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만나서 하는 이야기 즐겁긴 해도/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간지러운 속삭임/그러니까 당신은 믿을 수 없어요.’ 노랫말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한 사회자가 “선곡할 시간을 미리 드리지 못했다”며 분위기를 수습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이 청와대에서 운동권 노래를 합창하고, 대통령 앞에서 집권당 수뇌가 태연히 ‘웃는 얼굴…’을 불렀으니 세상이 정말 바뀌기는 바뀐 모양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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