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병익 칼럼]‘개혁’을 남발하면…

  • 입력 2004년 6월 9일 18시 29분


‘개혁(改革)’이란 말이 여기저기, 이런 저런 곳에 그것도 하도 자주 사용되어 새삼 국어사전을 펼쳐보았다. ‘제도나 기구 따위의 낡거나 불합리한 점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고쳐 새롭게 함.’ 그러니까 이제는 맞지 않거나 잘못된 공적 시스템들을 현행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정의롭게 고친다는 뜻이다. 옳고 좋고 아름다운 말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그럼에도 내가 이 어휘에 왜 이처럼 귀가 간지러워질까 생각하게 되었다.

▼식상한 국민은 ‘개혁 피로감’▼

무엇보다 이 건강하고 역동적인 ‘개혁’이란 말이 너무 회자되고 남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우선 떠오른 이유였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제도와 정책과 관행 인물 정신에 이르기까지 숱한 층위에서 개혁이 외쳐지고 있다. 더러는 변화 조정이나 개편 수정 개정 혹은 개선 혁신과 같은 인접된 말이 쓰일 만한데도 그 모두가 거의 개혁이란 하나의 말로 수렴된다. 어휘의 부적절한 선택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아무리 좋은 말도 너무 자주 사용되면 광고 카피처럼 상투적이 되고 ‘입에 발린 소리’로 천박해져 그 신선감과 무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낡거나 불합리한 점을 새로 고친다’는 개혁 의지에는 보다 좋은 쪽으로 바꾸어 나간다는 가치평가를, 그것도 선험적으로 함유하고 있어 강한 도덕적 현실적 명분을 확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는 데 항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명분 때문에 개혁론자들은 심리적인 프리미엄을 갖고 실제 권력간의 갈등에서 우선권을 장악할 수 있고, 혹은 개혁의 당위성에 회의(懷疑)하는 사람에 대해 간단히 ‘보수반동’으로 비난할 수 있게 된다. 구시대의 집권자들은 개혁 대신 정화나 사정이란 말을 선택했지만 도덕적 선의를 가진 이 말들은 억압적이면서도 내용은 닳아져 버린 헛말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억압적인 것은 위에서 내린 요구이기 때문이고, 헛말이 되는 것은 지나친 반복으로 말의 선도(鮮度)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문민정부의 통치자들 앞에 ‘제왕적’이란 수사가 붙은 것도, 그리고 오래잖아 국민이 ‘개혁 피로감’에 젖어 부정적인 신드롬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다.

개혁에는 의도와 착수에 강조점이 놓여 있을 뿐 결과의 피드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잘못되어 있다고 모두가 판단하더라도 이를 개혁하는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결국 개혁의 안(案)들은 제도든 기구든 정책이든 관행이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것은 토론과 타협과 합의를 거쳐 시행되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평가와 후속 조처를 필요로 한다. 개혁 의지만을 강조함으로써 그 과정의 절차를 생략한다든가 그 결과를 재검토하지 않는다면 개혁은 개악으로 혹은 ‘영구개혁론’으로 당초의 의도를 배반할 수 있다. 개혁의 도덕성은 그 명분에 담보된 것이 아니라 그 실제적 결과로 입증되어야 한다. 개혁의 방향과 실제가 탈(脫)가치화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명분보다도 결과가 더 중요▼

지금 우리 시대는 모든 점에서 거대한 변화를 치르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우리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제도와 시스템은 개발도상국 시절에 만들어져 한 세대 이상을 주도하며 구조화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할 단계에 이르렀고 신자유주의며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이며, 갖가지 분야의 현저한 성장과 변모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린 시절에 입던 옷을 버리고 지금 몸에 맞을 옷을 새로 맞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시급하다. 그래서 개혁이란 노무현 정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맡아야 할 과업이다. 다만 그 개혁이 아무런 ‘단서’ 없이 일방적으로 남용된다면 그 결과가 반드시 희망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