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시절인 1986년 4월 19일, 정부가 각 언론사에 내린 ‘보도지침’ 내용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유럽 순방 중이었고 정부의 언론대책 담당자는 비행기 안에 마련된 집무실 분위기를 이렇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른 보도지침은 ‘유럽 순방 기사를 연일 톱으로 처리할 것’이었다. ‘땡전 뉴스’는 이처럼 권력자측의 요구를 방송사들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거의 매일 밤 9시에 나타나 시청자들을 분통 터지게 했다.
▼官이 몸 낮춰 민생에 헌신해야▼
목민심서가 어떤 책이기에 이를 앞세워 대통령의 이미지를 그럴듯하게 꾸미려 한 것일까.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은 지방행정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담고 있다. 책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애민(愛民)정신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이다. 특히 관(官)이 몸을 낮추어 민생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했다.
정약용과 베트남의 정치지도자 호치민(胡志明·1890∼1969)….
이들은 어떤 사이일까. 프랑스 작가가 쓴 어느 호치민 평전을 보니 호치민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산을 꼽았다. 목민심서를 몇 장 넘기며 읽는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호치민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베트남을 이끌어 갈 방향을 잡았다고 고백했다. 해마다 다산 기일에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니 존경심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어떤 경로로 그 시대에 목민심서가 호치민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학자의 위대한 사상이 이방(異邦) 혁명가의 가슴을 달구어 놓았음이 틀림없다.
최근 ‘다산학’을 연구하고 실천운동을 추진할 다산연구소가 창립됐다. 이 연구소의 활동 목표 가운데 하나가 눈길을 끈다. 목민심서를 공무원 임용시험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목표가 실현될지는 미지수이나 국민 세금에서 월급을 받는 공직자라면 이 책의 알맹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야 정치 지도자, 국무위원 등 지도자급 인사들은 목민심서를 읽었을까. 아직 읽지 않았다면 얼른 책장을 펼쳐 보는 것이 좋고 이미 읽었다면 실천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집필 당시와는 시대가 달라 책 내용대로 따를 수 없는 부분이 많기는 하다. 지도자들이 민생의 원리를 밝힌 책을 외면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 처세술 관련서 따위를 뒤적이면 그런 나라에선 미래를 위한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없다.
민생 현장에 귀를 기울여 보라. 일자리를 잃어, 카드빚을 갚지 못해, 장사가 되지 않아, 부도가 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작년 한 해에 국민 한 사람이 낸 세금은 평균 300만원에 이르러 사상 최다액이었다. 1995년엔 160만원이었으니 8년 만에 거의 갑절로 늘어난 셈. 앞으로 세금 증가 추세는 더욱 가파를 것으로 보인다. 수도 이전에 드는 수십조원은 결국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 아닌가.
▼재계대표 불러 ‘투자맹세’ 시키면▼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업에 활기가 감돌아야 한다. 재계 총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훈시를 하면서 투자활성화를 기대하는가. 이런 자리에 억지 출연하는 당사자들로서는 ‘공포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대통령 경제부총리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임석해 압도당하는 그 상황에서 투자확대 계획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 기업 대표들이 통치자 앞에서 ‘투자 맹세’를 하는 장면 탓에 혹시 외국인들 입에서 “한국이 시장경제 체제국인가”라는 질문이 나올까 걱정스럽다.
권력자가 민간을 옥죄면 안 된다고 역설한 다산 사상은 시장경제원리와 맥을 같이한다. 다산의 가르침 하나를 되새기자.
“경제는 우물과 같으므로 잘 길러 쓰면 오래 간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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