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민간인 살해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당연히 테러집단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우리 정부가 무고한 젊은이를 석방시키기 위해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했다는 점에도 분노하고 있다. 또 사실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정부 위기대응 체제의 허점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정보 능력없이 自主외쳐봐야…▼
주무 부처인 외교통상부는 사건 발생 3주일이 지나도록 피랍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또한 이라크 현지 대사관은 업체 사장과 수시로 접촉하면서도 피랍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다. 이라크 현지의 특수한 상황에 비춰볼 때 이번 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피랍 직후 외교부에 김씨의 실종 여부를 문의했다는 AP통신의 발표와 관련된 의혹도 철저하게 규명돼야 할 것이다.
미국이 피랍 사실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이를 한국에 전해주지 않았다는 주장이 마치 사실인 양 유포되기도 했다. 외교부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초기부터 대응했다면 한미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피랍 사실이 알려진 뒤 정부의 대응을 보면 과연 이 정부가 위기대응 체제를 제대로 갖추고 이를 작동시키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 외교부는 합동대책회의장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아무런 근거와 정보도 없이 김씨의 생환이 ‘희망적’이라고 보고했지만, 그때는 이미 김씨가 살해된 뒤였다. 이것으로 정부의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의 부재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자주 외교를 그토록 강조해 온 정부다. 이 정도 능력을 갖고 어떻게 ‘자주’를 달성하려고 했는지, 허장성세(虛張聲勢)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의 대책회의장 방문과 관련한 실수에 대해서는 대통령비서실측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굳이 대통령이 공개석상에 나서야 했는지, 보다 신중하게 판단했어야 했다. 이번 사건은 위기상황 발생시 노 대통령이 제대로 보좌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라크 추가 파병의 공식 결정을 전후해 이라크 교민 안전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어야 했지만 그런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추가 파병 결정과 동시에 우리 교민들이 납치와 테러의 전략적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민 대책, 대이라크 주민 홍보 정책, 이라크 주둔 미군들과의 긴밀한 정책적 협조 등을 동시적으로 고려하는 ‘추가파병 종합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그게 미흡했음이 이번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외교-국방-정보부처 힘 모을때▼
하지만 이번 사태에 직면해 우리가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테러집단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 될 뿐이다. 4대국 공관을 제외하고 여타 지역의 공관은 예산 인력 조직 면에서 거의 빈사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 외교의 현실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외교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 정부와 국회는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 국내정치적 상황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제 더 이상 국내적 상황에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자이툰부대가 파병되기 이전에 현지 이라크 다국적군 사령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외교 국방 정보 부처들의 유기적 협조하에 위기대응체제를 재정비하는 가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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