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재호/弔問 방북

  • 입력 2004년 6월 25일 18시 40분


지난해 10월 26일 김용순 북한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 “정부 차원에서 조의 표명을 하자”는 의견들이 적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다음 날 한 민간단체의 포럼에서 “참 안된 일로 개인적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짤막하게 언급한 게 전부였다. 현명한 대응이었다.

▷대남담당 비서란 북한의 대남전략을 총괄하는 자리다. 선전 선동은 물론이고 남파간첩까지도 관할한다. ‘개인 김용순’에 대해서는 이쪽에서도 개인 차원에서 한마디 할 수는 있다. 고인(故人)이 남북관계 개선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니까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니다. 오랜 기간 회담하다 보면 서로 정(情)도 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김용순’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조의를 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통성에 관한 문제다. 북측 역시 남측 공직자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 적이 없다.

▷이런 원칙은 김대중 정부에서도 지켜졌다.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회고다. “2000년 6월 정상회담의 날짜까지 잡혔는데 북측이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참배하라고 요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가까스로 양해를 얻어냈지만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숙소인 백화원초대소에서 나오다가 승용차를 좌측으로 돌리기만 하면 곧 금수산궁전이다. 북측이 마음만 먹으면 꼼짝없이 궁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북측이 약속을 지켰지만 이 문제로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이 하루 늦게 열렸다.”

▷김 주석 사망 10주기(7월 4일)를 앞두고 정부는 조문 목적의 방북은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조문이 아닌 목적으로 방북하는 경우다. “조문 행사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는다고 해도 방북자들을 일일이 따라다닐 수도 없고 보면 확인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결국 방북자들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북측의 권유가 있더라도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경솔한 행동으로 노무현 정권 들어 이제 겨우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남북관계에 누(累)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한미관계를 비롯해 얼마나 미묘한 안보환경 속에 놓여 있는가.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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