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성희/기자와 외교관

  • 입력 2004년 6월 27일 18시 54분


한 노(老)외교관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외교관이 갖춰야 할 여러 자질 중에서 기자적 자질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교관이라면 주재국 정보에 누구보다 빠르고 능통해야 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취재하고 정보원도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기자는 국민의 알권리에 봉사하고, 외교관에게는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기자는 언론사에 송고하고 외교관은 정부에 보고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국익을 위해 뛴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정보 마인드를 갖추면 좋을 직업이 비단 외교관뿐일까. 정치인, 기업인, 인권운동가, 투자자들에게도 정보는 성공의 필수요소다. 심지어 요즘엔 테러리스트들도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어줍지 않은 비디오 저널리스트(VJ) 행세를 하며 카메라 앞에서 선언문을 읽고 무고한 생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자기들의 주장을 가장 충격적으로 가장 빨리 전달하는 데 실연(實演) 테이프만 한 것이 없다고 여긴 듯 그들은 통신사로 테이프를 보내 삽시간에 전 세계로 공포를 퍼뜨렸다. 언론인 행세에는 서툴지언정 언론의 생리와 정보의 유통경로에는 훤했다.

▷아깝고도 선한 생명 하나가 사라진 지금, 관심은 또 다른 한 테이프로 집중되어 있다. 이라크에서 피랍 살해된 김선일씨의 실종 직후 모습이 담긴 테이프가 뒤늦게 공개되면서 외국 통신사의 도덕적 책임론과 우리 정부의 허술하고 어처구니없는 정보 관리 능력이 함께 문제되고 있다. 김씨를 구명하는 일이 우리 정부의 몫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에 비해 외국의 통신사가 납치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 한국인의 구명에 적극적이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같은 정보라도 투자자가 접하면 돈이 되고, 기자가 접하면 특종이 되며, 외교관이 접하면 자국민의 안녕과 직결된다. 그 노외교관의 말처럼, APTN의 ‘제보’를 접한 외교통상부의 직원이 기자적 자질을 발휘해 정보를 끝까지 추적했다면 어땠을까. 제보자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국제적인 정보망을 동원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면 어땠을까. 이라크로 떠난 한국 청년의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척박한 남의 땅에서 스러진 고(故) 김선일씨의 명복을 빈다.

박성희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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