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피살사건을 둘러싼 정부 대응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외교안보 라인에 대한 문책론이 들끓는 동안 줄곧 침묵을 지켰던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문책론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입장은 “감사원의 진상조사 후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판단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번 사건에 따른 문책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문책 범위를 최소화하겠다는 생각도 배어있는 듯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형 악재가 터지면 일단 해당 부처 장관의 목을 날려서 여론을 잠재웠던 과거의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인식에는 현재의 외교안보 라인 진용을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 같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주한미군 감축협상, 이라크 파병 등 중대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섣불리 인적 교체를 단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국정에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는 너무 안이하고 국민 여론과도 동떨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감사원의 면밀한 조사를 통해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리고 향후 외교안보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쳐나가겠다는 뜻은 좋다. 하지만 여권 내에서도 비상한 대처가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높고 사태 원인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는데도 책임문제를 뒤로 미루는 식으로 비치는 것은 독단적인 국정 운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당장 열린우리당만 해도 표면적으로는 노 대통령이 천명한 ‘선(先) 조사, 후(後) 문책여부 결정’이란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 핵심당직자는 “노 대통령의 말은 원칙적으로는 옳은 얘기지만 정부의 총체적 대응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처음 내놓은 발언으로서는 조금 방향이 빗나간 듯한 느낌이다”고 지적했다.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뒤에는 문책을 해봤자 효과가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한편 최근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도는 최악의 수준으로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MBC ‘시사매거진 2580’ 제작진이 25일 전국의 성인남녀 1089명을 대상으로 코리아리서치센터(KRC)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28.2%로 불과 10여일 전에 비해 10%가량 하락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28일 본보와 KRC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23.6%를 기록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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