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건전재정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라며 “고령화사회 진입으로 재정수요 급증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충분한 공감대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국책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같은 의견은 본보 경제부가 28일 수도 이전 등 잇따른 대형 국책사업이 재정에 미칠 영향에 대한 재정학이나 정책학 분야 전문가들의 시각을 물어본 결과 거의 공통적으로 지적됐다.
또 이날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기획예산처 주최로 열린 ‘국가재정운영계획 토론회’에서도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국책사업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우려가 잇따라 나왔다.
▽대규모 국책사업, 국가 재정은 충분한가=한양대 경제금융학부 나성린 교수(재정공공경제학회 회장)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각종 국책사업의 비용은 정부가 발표한 것보다 더 들어갈 것”이라며 “정부가 잇따라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 ‘돈 버는 방법은 모르면서 쓸 곳만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또 기회비용(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이에 따라 포기해야 하는 것을 비용으로 표시한 것) 측면에서 수도 이전 등에 드는 비용을 다른 분야에 쓰면 효과적일 수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경제학과 유한성 교수는 “외환위기 극복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 재정의 건전성이 악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실제 사업비는 정부 발표보다 훨씬 더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랬을 때 국가 재정이 감당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돈 쓸 곳은 많다=전문가들은 최근 발표된 국책사업을 빼놓고도 재정압박이 심해질 것을 우려했다.
순천향대 경제금융보험학부 김용하 교수는 “앞으로 공무원연금 적자 규모가 커질 게 분명하고 주한미군 감축에 따른 국방예산 증액도 불가피하다”며 “쓸 데는 많은데 이렇게 대규모 국책사업을 대거 추진할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경제학부 김준영 교수는 “앞으로 사회복지 재원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수도 이전과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사업 중 어느 것이 급한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충분한 토론 거쳤나=전문가들은 또 수도 이전 등 대규모 국책사업의 의사결정에 대해서도 충분한 분석과 공감대 형성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동국대 행정학과 박병식 교수(정책분석평가학회 회장)는 “선진국은 주요한 정책결정을 하기에 앞서 건축비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효과까지 포함해 ‘사회적 비용 및 편익’을 분석한다”며 “최근 발표된 주요 국책사업에 대해 이 같은 분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 임주영 교수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일부 국책사업들은 ‘정치적 구호’ 때문에 추진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공론화 과정 없이 일이 추진되다 보니 재정 전문가들도 정부가 발표한 대형 국책사업들이 실질적으로 추진될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주최 토론회에서도 쏟아진 재정 걱정=예산처 주최 ‘국가재정운영계획 토론회’에 참석한 국책 연구기관과 민간 전문가들은 재정부담에 대한 우려를 밝혔다.
온기운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은 “고령화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진행되고 있고 저출산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며 “게다가 앞으로 한국의 성장잠재력이 계속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도 정부가 밝힌 재정운용계획은 이 같은 점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길행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재정수요는 늘어나는데 정부가 조달할 수 있는 돈은 부족해지고 있다”며 “재정운용이 지나치게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는 “정부가 제시하는 사업들을 보면 앞으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세제(稅制) 개혁을 통해 세원(稅源)을 확보하고 세수(稅收)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영환 국토연구원 부원장은 “정부가 지금까지 밝힌 국책사업에 몇 백조원의 돈이 들어간다는 부정확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며 “정부는 재정수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승훈 한국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소장은 “재정수입을 늘리려면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이를 위해서는 산업현장에서 일할 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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