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그들의 희망가’에 대한 절망

  • 입력 2004년 6월 29일 18시 34분


6·5 재·보선에서 참패한 여권은 즉각 ‘희망가’라는 곡을 들고 나와 국면 반전을 시도했다. 7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대통령이 언급한 “새로운 희망”이 그 전주(前奏)였다. 이후 대통령의 ‘이해찬 희망가’와 열린우리당의 ‘신행정수도 희망가’가 잇따라 언론을 탔다. 그리고 최대 문제곡인 외교통상부 차관의 ‘김선일 희망가’가 나라를 뒤흔들었다.

‘결코 위기는 아니야’라는 노래에 물려 있던 때라 이 같은 ‘억지 희망가’도 처음엔 참을 수 있었다. 여간해선 희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갑갑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자 음정 화음은 고사하고 분위기조차 맞지 않는 희망가는 곧 스트레스만 가중시켰다.

▼후렴이 더 걱정되는 희망가▼

“이해찬 의원을 총리로 지명하고 보니 정말 새롭게 희망을 가진다.” 6월항쟁 관계자들과의 9일 청와대 오찬에서 대통령이 부른 희망가는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선곡(選曲)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김혁규 총리 카드’를 완강하게 고집하던 대통령이었기에 갑작스러운 그의 희망가가 귀에 설었다. 김혁규 의원은 그 노래를 어떻게 들었을지 궁금하다.

또 온 국민이 김선일씨의 생사를 걱정하던 22일 열린우리당은 수도 이전을 ‘대희망의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 국론이 첨예하게 갈린 사안에 대한 일방적인 희망가를, 하물며 그 시점에 부를 수 있는 집권 여당의 무신경이 무섭다. 어제도 서울시청 앞에선 천도에 반대하는 대규모 궐기대회가 열렸는데….

희대의 소극인 ‘김선일 희망가’가 의기양양하게 울려 퍼진 것도 22일 밤이었다. 가사 못지않게 가수들의 면면이 상징적이다. “(납치범들이 협상시한을 연장했다는) 알 아라비야 TV 보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보고하시죠.”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선창한 것은 대통령이 무척 아낀다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이를 받아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며 길이 기억될 오발(誤發)을 한 외교부 차관 또한 일찍이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춘 ‘개혁의 동지’로 알려진 인물. 그래서 두 실세의 이중창은 현 정권의 취약한 이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시대의 삽화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바보들의 희망가’란 제목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밀히 말해 여권의 희망가는 2002년 대선 때 위력을 발휘했던 ‘희망돼지 저금통’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저금통은 법원에서 유죄가 인정되고, 가외로 막대한 액수의 불법대선자금 수수 사실도 밝혀졌다. 희망이란 본래 떨어질 확률이 훨씬 높은 복권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달래는 게 상책일 듯싶다.

희망가의 후렴이 더 걱정된다. 뭔가 뜻대로 안 되면 상투적으로 언론 탓을 해 온 그들의 전력 때문이다. 외교부 차관이 지난해 외교안보연구원장 시절 국정토론회에서 언론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대통령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한 것이 떠오른다. “대통령의 방미(訪美) 성과가 좋았는데, 우리 언론이 본질에 접근해 ‘잘했다’고 쓴 기사는 없었다”고.

▼무책임한 희망은 허풍이다▼

당시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청와대 직원의 향응 수수 사건과 관련해 “진상을 밝히고 해도 되는데 후속 기사가 두려워 아랫사람 목 자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김선일씨 피살사건과 관련해 “책임 소재가 밝혀지기 전에 사회적 분위기만으로 책임을 지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과 어법이 비슷하다. 말인즉 옳지만 어쩐지 느낌이 편치 않다.

어떤 희망도 그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다만 능력과 책임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아 문제가 생길 뿐이다. 무능한 사람의 무책임한 희망은 공상이나 망상이나 허풍일 수밖에 없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현실을 윤색하고 호도하기 위해 구차한 희망을 남발하는 것. 현 정권이 현재 처한 곤경도 겉도는 개혁에 대한 너무 짙은 ‘말 화장(化粧)’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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