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김 사장에게 20차례나 ‘이라크 철수’를 권고했고 김씨 피랍 이전에도 수차례에 걸쳐 각별한 신변 안전 조치를 당부했다”며 ‘김 사장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 해외지사장을 지낸 기업인 A씨는 “내 경험으로 볼 땐 김 사장이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불신은 ‘구멍 난 재외교민 보호’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A씨는 덧붙였다.
▽“한국 대사관 맞습니까”=재외동포나 해외여행자의 가장 큰 불만은 ‘한국 정부가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려 애쓴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A씨는 “중동 근무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대사관은 재외국민이 아닌 외교통상부 본부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라며 “‘민원 처리’보다 ‘본부 보고’가 늘 일의 우선 순위에 있었다”고 말했다.
경남 마산에 사는 30대 김모씨는 “국제결혼하기로 약속한 중국 여자의 출국 비자 신청이 기각돼 전화로 주중 영사관에 이유를 물었더니 ‘전화상으론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싸늘한 답변뿐이었다”며 “결국 직접 중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설움은 더욱 크다. 탈북자 윤모씨는 최근 한 아시아 국가의 외국인 학교에 들어갔다가 결국 쫓겨났는데 당시 한국대사관에선 “탈북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오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윤씨는 주장했다. 윤씨는 “그것은 사실상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탈북하라는 얘기와 같은 주문이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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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국민 보호’는 3D 업종?=2003년 현재 재외동포는 608만명, 한 해 동안 출국자는 708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한국 외교의 ‘재외국민 보호’ 업무는 외교관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일 뿐이다.
10년 차의 한 외교관은 “본부에서 근무하며 대민 접촉을 한 번도 안 해보다가 ‘해외 영사’가 됐을 때 온갖 민원이 폭주하는 바람에 우울증에 걸릴 만큼 심각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영사 업무는 당연히 ‘찬밥’ 신세가 되고 정무나 경제 업무를 맡기 전 ‘잠시 고생하는 자리’처럼 간주된 지 오래라는 것.
▽외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라=한국 외교는 냉전시대엔 북한과의 ‘표 대결’ 외교, 90년대엔 공산 국가와의 ‘북방 외교’, 그 이후엔 ‘인권 외교’ ‘남북화해협력 외교’ 등 고공전에만 치중해왔다.
그러다보니 ‘재외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근본을 망각하는 외교를 하지 않았느냐는 자성론이 외교부 내에서도 일고 있다.
한 중견 외교관은 “솔직히 미국의 재외국민 보호를 보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킬 때가 있다. 미국민이란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국가 능력이 총동원된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최근 미국 내 총영사관 같은 1급지 근무 요원을 줄여 중국 중동 같은 3급지의 인력 부족을 메우는 ‘인력 재배치’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인력 부족 타령’이 더 이상 ‘구멍 난 재외국민 보호’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자성에 따른 것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외교부 "민원 콜센터가 해법"▼
외교통상부는 폭주하는 영사업무의 해법으로 종합민원 콜센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민원인들이 여권 비자 병무 세금 관련 문의사항에 관해 콜센터로 전화를 걸면 전문 요원과 상담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민원의 70%가 ‘단순 질문’이어서 콜센터의 효과는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전화의 보급으로 통신비용도 ‘사실상 무료’가 될 전망이다.
콜센터의 상담자들이 분야별로 전문성을 갖출 경우 민원인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으로 외교부는 기대하고 있다. 이미 자체 콜센터를 운용 중인 병무청 외에 경찰청 법무부 관세청 산업자원부 등 민원 관련 부서의 전문인력도 지원받아 ‘원 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외교부의 장기 구상.
외교부는 일단 43억원을 투입해 서울외곽 지역에 67명 규모의 콜센터 설치를 추진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인건비 임대료 등을 고려할 때 초기비용이 수도권의 절반 수준(21억원)인 중국 다롄(大連)에 콜센터를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콜 센터는 내년부터 시범운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현재 외교부는 연간 민원 건수를 68만3000건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당 처리시간을 15분으로 잡을 때 17만시간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전산화, 전문 상담원화를 통해 업무처리 시간이 10분(콜센터 설립 초기)에서 5분(정착 이후)으로 빨라지면 연간 11만시간을 절감하게 된다. 외교부측은 “줄어든 업무시간을 현장 중심의, 기업지원형 영사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자체 개혁안에는 고객인 해외 교민의 평가를 받는 것도 포함돼 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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