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시스템 있나]<中>구멍난 외교부 영사업무

  • 입력 2004년 6월 29일 18시 53분


김선일씨 피살 사건에 대한 미스터리 중 하나는 ‘김씨가 근무했던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왜 피랍 사실을 주이라크 한국 대사관에 곧바로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정부는 “김 사장에게 20차례나 ‘이라크 철수’를 권고했고 김씨 피랍 이전에도 수차례에 걸쳐 각별한 신변 안전 조치를 당부했다”며 ‘김 사장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 해외지사장을 지낸 기업인 A씨는 “내 경험으로 볼 땐 김 사장이 대사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불신은 ‘구멍 난 재외교민 보호’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A씨는 덧붙였다.

▽“한국 대사관 맞습니까”=재외동포나 해외여행자의 가장 큰 불만은 ‘한국 정부가 나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려 애쓴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A씨는 “중동 근무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대사관은 재외국민이 아닌 외교통상부 본부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라며 “‘민원 처리’보다 ‘본부 보고’가 늘 일의 우선 순위에 있었다”고 말했다.

경남 마산에 사는 30대 김모씨는 “국제결혼하기로 약속한 중국 여자의 출국 비자 신청이 기각돼 전화로 주중 영사관에 이유를 물었더니 ‘전화상으론 설명해 줄 수 없다’는 싸늘한 답변뿐이었다”며 “결국 직접 중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의 설움은 더욱 크다. 탈북자 윤모씨는 최근 한 아시아 국가의 외국인 학교에 들어갔다가 결국 쫓겨났는데 당시 한국대사관에선 “탈북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오라”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윤씨는 주장했다. 윤씨는 “그것은 사실상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탈북하라는 얘기와 같은 주문이었다”고 덧붙였다.

가나무역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재외국민 보호에 관한 외교통상부의 영사업무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여줬다. 5명으로 구성된 감사원 조사단이 주 이라크 대사관을 상대로 김씨 사건의 대응태세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29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원대연기자

▽‘재외국민 보호’는 3D 업종?=2003년 현재 재외동포는 608만명, 한 해 동안 출국자는 708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한국 외교의 ‘재외국민 보호’ 업무는 외교관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3D(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일 뿐이다.

10년 차의 한 외교관은 “본부에서 근무하며 대민 접촉을 한 번도 안 해보다가 ‘해외 영사’가 됐을 때 온갖 민원이 폭주하는 바람에 우울증에 걸릴 만큼 심각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영사 업무는 당연히 ‘찬밥’ 신세가 되고 정무나 경제 업무를 맡기 전 ‘잠시 고생하는 자리’처럼 간주된 지 오래라는 것.

▽외교의 근본으로 돌아가라=한국 외교는 냉전시대엔 북한과의 ‘표 대결’ 외교, 90년대엔 공산 국가와의 ‘북방 외교’, 그 이후엔 ‘인권 외교’ ‘남북화해협력 외교’ 등 고공전에만 치중해왔다.

그러다보니 ‘재외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근본을 망각하는 외교를 하지 않았느냐는 자성론이 외교부 내에서도 일고 있다.

한 중견 외교관은 “솔직히 미국의 재외국민 보호를 보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킬 때가 있다. 미국민이란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국가 능력이 총동원된다는 느낌을 주곤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최근 미국 내 총영사관 같은 1급지 근무 요원을 줄여 중국 중동 같은 3급지의 인력 부족을 메우는 ‘인력 재배치’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인력 부족 타령’이 더 이상 ‘구멍 난 재외국민 보호’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자성에 따른 것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외교부 "민원 콜센터가 해법"▼

외교통상부는 폭주하는 영사업무의 해법으로 종합민원 콜센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민원인들이 여권 비자 병무 세금 관련 문의사항에 관해 콜센터로 전화를 걸면 전문 요원과 상담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민원의 70%가 ‘단순 질문’이어서 콜센터의 효과는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전화의 보급으로 통신비용도 ‘사실상 무료’가 될 전망이다.

콜센터의 상담자들이 분야별로 전문성을 갖출 경우 민원인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으로 외교부는 기대하고 있다. 이미 자체 콜센터를 운용 중인 병무청 외에 경찰청 법무부 관세청 산업자원부 등 민원 관련 부서의 전문인력도 지원받아 ‘원 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외교부의 장기 구상.

외교부는 일단 43억원을 투입해 서울외곽 지역에 67명 규모의 콜센터 설치를 추진할 방침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인건비 임대료 등을 고려할 때 초기비용이 수도권의 절반 수준(21억원)인 중국 다롄(大連)에 콜센터를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콜 센터는 내년부터 시범운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현재 외교부는 연간 민원 건수를 68만3000건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당 처리시간을 15분으로 잡을 때 17만시간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전산화, 전문 상담원화를 통해 업무처리 시간이 10분(콜센터 설립 초기)에서 5분(정착 이후)으로 빨라지면 연간 11만시간을 절감하게 된다. 외교부측은 “줄어든 업무시간을 현장 중심의, 기업지원형 영사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자체 개혁안에는 고객인 해외 교민의 평가를 받는 것도 포함돼 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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