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통치 10년]권력세습 한계 ‘신비주의’로 극복

  • 입력 2004년 7월 6일 19시 05분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8일로 통치 10년을 맞는다. 그가 국방위원장, 노동당 총서기에 최종 등극한 것은 1997∼98년이지만, 실질 통치는 10년 전 이날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김 위원장의 10년 통치는 부친(고 김 주석)의 카리스마를 활용한 ‘유훈(遺訓)통치’, 군부를 다독이며 장악해 간 ‘선군(先軍)정치’, 경제의 틀을 바꾸려는 ‘실리사회주의’ 등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된다.

김 위원장은 권력을 세습받은 태생적 한계를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신비주의적 통치 행태로 극복했다는 평가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그의 육성이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된 것은 1992년 인민군 창건기념일 퍼레이드에서 “조선인민군에 영광 있으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남북정상회담 때 그의 목소리는 한국엔 생중계됐지만, 북한 시청자는 ‘그림’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김 위원장은 상징 조작에도 능했다. 세종연구소 정성장(鄭成長) 연구위원은 “‘선군정치’ ‘자폭정신’ 등의 선전문구는 ‘북한은 건드리면 골치 아플 수 있다’는 이미지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이 표방하는 통치자로서의 자화상은 ‘광폭(廣幅)정치’라는 표현에 잘 담겨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이면서도 자애롭고 포용력이 있는, 이른바 ‘통 큰 정치’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김 주석 사망 이후 김 위원장은 상당 기간 공식적으론 권력을 승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권 장악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그가 워낙 뛰어난 조직장악 수단을 발휘했던 탓이다. 김 위원장의 김일성종합대 은사인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97년 한국에 망명한 뒤 “2세 지도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 위원장의 사람장악 능력은 평가해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북한이 2002년 후반기에 처음 사용한 ‘실리사회주의’는 김 위원장의 실용주의적 성향 및 북한이 당면한 냉엄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북한 전문가인 서동만(徐東晩) 전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은 “그는 주체사상을 견지하면서도 쓸모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도입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집권 초기 94∼97년 가뭄과 홍수로 주민 300만명 아사설이 나돌았을 때 민생보다는 ‘정권 안위’를 선택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시 그는 “(부족한 자원을 민생이 아닌 군수산업에 투입한 결정을) 후대가 이해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지만 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냉엄하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경제 성적표는…▼

북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사망한 이후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이어받은 북한 경제 10년의 성적표는 ‘양적 퇴보’와 ‘질적 개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양적인 측면에서 2004년 7월 현재의 북한 경제는 1994년 김 주석 사망 당시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국민총소득(GNI)은 지난해 184억달러로 1994년의 212억달러보다 적다. 정부의 한 해 예산은 1994년 192억달러에서 2001년 98억달러로, 석탄 생산량은 94년 2540만t에서 지난해 2230만t으로 줄었다.

이는 내 외부적 원인이 겹친 결과다. 1989년부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돼 대외 무역이 타격을 받았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이 누적돼 생산력도 떨어졌다.

여기에 김 주석 사망 이후 1997년까지 해일과 홍수, 가뭄 등 각종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약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공장가동률은 30%대로 떨어졌다.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1994∼1997년)’에 김 위원장은 ‘유훈(遺訓)통치’를 내세우며 경제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한 발 물러서 있었다.

김 위원장은 1997년 10월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한 뒤에야 ‘강성대국론’을 내세우며 경제 회복의 전면에 나섰다. 우선 농업 생산의 정상화를 꾀해 ‘먹는 문제의 해결’에 주력했다.

이어 2002년 7월 ‘7·1경제관리 개선조치’를 단행했고 2003년 3월에는 시장의 기능을 공식 인정했으며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하는 현대식 종합시장 제도를 도입했다.

양문수(梁文秀)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7·1조치 이후 일련의 조치는 북한 당국이 부진한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 시절에 자발적으로 형성된 분권화와 시장 메커니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당국의 노력에 힘입어 1990년 이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북한 경제는 1999년 이후 지난해까지 5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했다. 이에 대해 고일동(高日東)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팀장은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가격자유화와 최소한의 사유재산권이 인정되지 않고 있으며 지도자의 개혁 의지도 불확실해 북한 경제의 획기적인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혁명 1세대 떠난 자리엔…▼

김일성 사망 10년 후 이른바 ‘혁명 1세대’에 속하던 인물은 모두 사라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들이 권력의 새 핵심으로 떠올랐다. ‘김정일 10년간’에도 세대교체 바람이 활발했다.

5월 초 평양에서 열린 14차 남북장관급회담에는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45)가 북측 수석대표로 나섰다. ‘40대 신세대’가 나선 것이다. 이전에 수석대표를 맡았던 김영성 내각 책임참사(59)와 최승철 전 적십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도 김정일 시대의 대남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경협이 활성화되면서 대남사업도 김일성 시대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아태평화위원회와 민족화해협의회 등으로 힘이 옮겨졌다. 또 금강산관광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인 송호경(宋浩景) 이종혁(李種革) 등이 떠올랐다. 김일성 시대의 대표적인 대남통이던 윤기복(尹基福)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은 지난해 5월 사망했다.

군부에서는 김일성 시대의 ‘막내’쯤 되는 조명록(趙明祿) 군 총정치국장과 김영춘(金英春) 군 총참모장이 핵심적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빨치산 세대’인 이을설(李乙雪) 전 호위사령관과 백학림(白鶴林) 전 인민보안상 등은 지난해 당 창건 55주년 행사 때 주석단 서열에서 뒤로 밀리는 등 권력의 전면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이명수(李明秀) 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박재경(朴在慶) 군 총정치국 선전부국장, 현철해(玄哲海) 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등 ‘빅3’가 김 위원장의 핵심 측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김일성 사망 직후 체결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채택의 주역인 강석주(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과 김계관(金桂寬) 외무성 부상 등은 10년 이상 협상을 이끌고 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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