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홍성태교수 서울 무분별 개발 비판

  • 입력 2004년 7월 12일 18시 04분


2년간 서울시내 곳곳을 발로 뛰고 직접 사진을 찍어 서울에 대한 도시문화 생태보고서를 완성한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종묘공원 내 횡보 염상섭 동상 옆에 앉아 역사가 숨쉬는 도시에 대해 설명했다. 홍 교수는 “횡보의 이 동상이 서울시내의 모든 동상 중 가장 자연스럽다”고 말했다.-박주일기자
2년간 서울시내 곳곳을 발로 뛰고 직접 사진을 찍어 서울에 대한 도시문화 생태보고서를 완성한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종묘공원 내 횡보 염상섭 동상 옆에 앉아 역사가 숨쉬는 도시에 대해 설명했다. 홍 교수는 “횡보의 이 동상이 서울시내의 모든 동상 중 가장 자연스럽다”고 말했다.-박주일기자
서울은 신음 중이다. 청계천 복원, 도심 재개발, 버스노선 수술로 인한 혼란, 여기에 수도이전 논쟁까지 더해져 고열에 시달린다. 그러나 한편에선 조심스레 옛 서울의 부활을 꿈꾸는 움직임도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이 그린 조선의 그림으로 서울의 옛 모습을 살려낸 ‘겸재의 한양진경’(동아일보사) 출간도 그 한 갈래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39·사회학)가 최근 출간한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는 바로 그런 옛 서울의 부활을 꿈꾸는 책이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난민(難民)의 도시’다. 세종로는 전투경찰들에 점령당한 계엄령의 거리가 됐고, 인사동은 거대한 돌덩이와 상업화의 논리에 짓눌리고 있다. 피맛골은 쓰레기와 화장실 악취에 오염됐고, 종로에서 시작해 청계로, 을지로를 타고 퇴계로까지 장악한 세운상가는 근대화가 서울에 남긴 긴 흉터다.

한강 남쪽의 풍경은 더 삭막하다. 서초동의 빈민촌 구룡마을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거대한 오피스텔 건물군으로 덮여 있다.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에서 암울하게 묘사된 ‘지하토굴과 거대한 빌딩의 공존’이 실현된 그림이다.

홍 교수는 600년 도읍지 서울이 이처럼 ‘난민 도시’로 바뀐 이유를 역사적으로 3단계로 나눠 살폈다.

그 첫째가 일제강점기의 능욕(凌辱)이다. 서울의 가장 중요한 공간적 상징이던 도성(都城)을 부수고,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조선총독부란 이질적 건물을 세웠다. 둘째는 6·25전쟁으로 인한 파괴. 그러나 서울이라는 공간의 기본 바탕이 되는 건물터와 도로까지 파괴한 것은 바로 박정희시대의 개발주의였다.

“유럽의 도시들을 보세요. 저 모퉁이를 돌아선 곳에서 선조의 삶과 부딪치고, 내가 앉아 있는 이곳에 몇 백 년 후 내 후손이 앉아 쉬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지요. 서울에는 그런 지속의 감정이 없습니다. 그런 지속성을 부여하려면 도시를 개발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박정희 시절의 개발독재는 한편으론 대중에 영합해 마구잡이 부동산 개발을 허용했고, 다른 한편으론 근대화의 성과 전시용으로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현재 서울시의 도심재개발계획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문화재 복원과 환경친화를 앞세웠을 뿐 본질적으로는 서울시의 원형 파괴라는 점에서 ‘신(新)개발주의’라고 비판한다.

“청계천 복원의 목표는 청계천 일대에 초고층 건물을 세우려는 ‘강북의 테헤란밸리화’에 있습니다. 500년간 이어져 온 건물터와 도로망이 완전히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위기라 할 수 있지요.”

서울을 ‘시민의 도시’로 되살리기 위한 홍 교수의 제안은 명료하다. 첫째, 최소한 4대문 안이라도 개발주의 논리에서 제외하자. 둘째,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거리를 바꾸자. 셋째, 서울을 칭칭 감은 전봇대와 전깃줄을 지하화하자. 넷째, 시각 공해를 유발하는 간판과 소음을 제한하자.

단순해 보여도 만만치 않은 이 목표들을 실천하려면 우선 서울시민 자신부터 난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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