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칼럼]內戰하듯 국정 할 건가

  • 입력 2004년 7월 19일 18시 46분


유지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과 제헌절 만찬을 하며 “대통령에게 악담하고 임기 마칠 수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이 주위에 꽤 많다”고 전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더 많은 국민은 대통령 임기가 아니라 나라 운세를 걱정하는 분위기다.

유 위원장은 ‘좀 사는 사람들, 기득권 누리는 사람들’을 특칭했다. ‘못사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속에서 정권에 대한 체념이 번지고 있다는 사실도 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민생 안녕과 나라 융성을 위해 갈등 치료에 진력해야 할 정권이 권력 강화를 위해 편 갈라서 재미 보기에 더 몰두한다는 걸 많은 국민은 이미 알아챘다. 젊은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리는 숱한 글에도 그 눈치 빠름이 번득인다.

▼‘거대빌딩 신문사’라는 상징조작▼

대통령은 어느 기업인을 “좋은 대학 나오고 크게 성공하신 분”이라 지칭함으로써 가방 끈 짧고 성공 못했다고 생각하는 다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기업인은 인권을 강조하는 정부 아래서 죽음을 택했다.

이번에 대통령이 꺼내든 표적은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빌딩 갖고 있는 신문사’다. 권력과 호흡이 맞는 매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귀가 따갑도록 이 말을 전파했다.

신문도 역사 속에서 영욕(榮辱)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말 나온 김에 좀 하자. 오늘의 정권 나팔수 같았다면 일제(日帝)하에서 4차례나 정간되고 광복되기 전 5년간 폐간의 운명에 처했겠으며,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광고 없는 신문을 내야 했고, 김대중 정권 아래서 짜맞추기 세무조사의 칼을 받았겠는가. 세상 달라지니까 민주화 특집 한다고 법석인 방송들이 침묵하던 전두환 정권 때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굽히지 않고 보도한 언론은 누구인가.

민주화를 향한 가시밭길을 국민과 함께 걸어온 신문을, 그런데도 기업으로 치면 종업원 700여명에 연간매출 3000여억원, 운전사 있는 승용차가 5대뿐인 신문사를 ‘서울 한복판 거대 빌딩’으로 상징 조작하고 공적(公敵)인 양 총공격하는 게 ‘민주화세력 정권’의 정도(正道)인가.

신문의 견제가 무력화(無力化)되면 절대 권력이 절대로 썩어 국가적 국민적 불행을 키운다는 게 세계의 경험이다. 그나마 신문이 명맥을 이어가는 지금도 이 정권 들어 집요하게 강화된 취재 봉쇄 등으로 국민의 알 권리가 크게 무너졌다. 신문이 퇴장하면 ‘맞고요 매체’들만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더 가릴 것이다. 국민이 국정에 대해 판단할 근거를 충분히 갖지 못하고서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나라야 어찌 되든 신(新)기득층 네트워크를 구축한 권력과 일부 운동권과 코드인사(人事) 시혜그룹과 편파왜곡 보도로 귀여움 받는 매체들은 당분간 단꿈을 꿀 터이다. 반면에 더 많은 국민은 세상 뒤집히면 내 세상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착각임을 깊어가는 삶의 고단함 속에서 깨닫게 될 터이다. 민심의 풍향계를 보면 이미 그 문턱을 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산업화의 열매로 어린이까지 매달 몇만원씩 내고 휴대전화 쓰는 세상이 됐지만, 성장 주도세력은 부패와 반민주 업보 때문에 구악(舊惡)집단으로 추락했다. 그렇다고 이들을 밀어낸 신권력이 영원한 주류로 살아남는다는 보장 또한 없다. 무능과 무책임, 더 번들거리는 이기심과 독점욕, 또 다른 반민주 행태 등으로 경제의 쪽박까지 깨고, 세계로부터 업신여김 받는 하류국가로 나라를 끌고 간다면 이들도 소멸의 역사를 피하기 어렵다.

▼‘국민과 함께 사는 길’로 돌아가라▼

둘러대기도 한두 번이지, 곳간이 비면 인심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말로는 자주(自主)를 되뇌지만 경제도 안보도 중국이 기침하면 독감 들고, 어느 외국으로부터도 제대로 대접 못 받는 나라꼴이 굳어지면 북한과 아무리 밀착해도 희망이 없음을 많은 국민은 안다.

참으로 나라의 오늘과 내일을 걱정하고, 국민을 위해 오만과 독선을 버리는 것이 신주류가 국민과 함께 오래 사는 길이다. 국정을 정치적 내전(內戰)의 연장선에서밖에 보지 못하는 병이 더 깊어지면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고 정권도 또 한번의 실패작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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