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해지는 탈북 루트=동남아 한 도시의 2층짜리 제법 큰 주택. 방이 5개인 이곳에는 현재 탈북자 200여명이 공동생활 중이다. 중국을 경유해 국경선을 넘은 탈북자들에게 잘 알려진 민간 탈북지원단체의 안가(安家)다. 탈북자 김영희씨(가명·32)도 작년 11월 북한을 출발해 국경선 3개를 넘어 이곳으로 왔다. 루트를 알려준 브로커에게 400만원을 주기로 했다.
탈북자들은 민간단체의 지시에 따라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8시까지 1층에서 주로 성경을 읽으며 지낸다. 외출은 금지.
워낙 수용인원이 많다 보니 비좁게 생활해야 하고 다툼도 잦다. 오래 머문 사람 중 일부는 자살소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최근 “곧 한국행 비행기에 탈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살아났다는 전언이다.
탈북 루트는 ‘동남아선’ 외에도 몽골국경을 넘어 울란바토르로 가는 ‘몽골선’, 중국주재 한국대사관과 영사관 혹은 외국공관과 기관에 진입하는 ‘공관선’, 위조여권을 이용해 여객기로 직접 한국으로 날아오는 ‘비행기선’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헤엄치거나, 수개월간 사막과 정글을 도보로 걷던 종전 방식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알려진 ‘공관선’을 이용하려면 비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지난해 9월 베이징 한국영사관을 통해 입국한 최모씨는 브로커에게 600만원을 줬다. 영사관 정문을 ‘공식’ 통과하기 위해 여권신청을 하는 조선족으로 위장할 가짜서류를 만드는 비용이다.
새로운 루트를 이용하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성공 가능성과 안전도는 90년대 후반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탈북자들이 각 루트에 대한 정보를 탈북 대기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성공확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2001년까지만 해도 연간 300∼500명이던 국내입국 탈북자수는 2002년 1139명으로 폭증했고, 작년에는 1281명으로 계속 증가세다.
▽북한의 변화=‘막는 자’가 느슨해졌다는 점도 대량 탈북을 부추긴다. 30대 탈북자 김모씨는 최근 북한의 동생과 통화하다 깜짝 놀랐다.
보위부 요원이 동생 집에 찾아와 “너의 형이 남으로 도망쳐 잘살고 있다더라. 너는 똑바로 살아라”고 경고만 하고 돌아갔다는 것. 과거 같으면 탈북자 가족들은 예외 없이 정치범 수용소나 산간지대로 추방됐다. 김씨는 “북한 당국의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체포한 탈북자를 조사한 뒤 정치적 이유가 아니면 지방의 노동단련대(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 3개월 정도 강제노동을 시키고 석방했다. 처벌이 느슨해지면서 탈북 재수, 삼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한 체제의 이완과 부정부패도 대량 탈북의 요인 중 하나. 먼저 탈북한 사람이 가족을 추가 탈북시키는 경우가 빈번해진 것이 그 증거다. 북한 국경수비대에는 아예 “제대할 때까지 돈을 벌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면서 돈을 받고 탈북을 돕는 경우도 생겨났다.
중국 위안화로 거래되는 이른바 ‘도강사례비’는 현재 200위안(약 3만원)선. 사례를 받은 북한군은 경비초소의 위치를 귀띔해주거나, 심지어 두만강 물이 불어나면 업어서 건네다 주기도 한다고 탈북자 송모씨(60)는 전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탈북을 엄격하게 통제하면 국제사회가 인권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데다 내부 불만이 더 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탈북을 ‘느슨하게’ 다루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대량 탈북의 문제점=올 3월 입국한 조민씨(가명·30)는 곧바로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 취직했다. 초기 정착금으로 1400여만원을 받았으나 집 임대료 1200만원을 내고 가재도구를 구입하자 수중에 남은 돈은 없었다. 탈북을 도와준 한국인 브로커에게 주기로 한 400만원 중 300만원은 아직 갚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는 “돈을 벌면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다른 탈북자들도 대부분 조씨와 같은 생각을 한다. 일단 한국에 오기만 하면 가족을 동반 탈북시키는 데 골몰한다.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탈북자 8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탈북자의 65%는 “정착금을 가족에게 송금하거나 데려오는 데 최우선적으로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탈북자 정착을 위해 지출된 정부지원금이 추가탈북을 위한 자금으로 ‘전용’되면서 탈북자 수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탈북자 증가속도가 한국사회의 ‘수용범위’를 초과하면 각종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민간 탈북지원단체들도 아직은 ‘탈북’에만 집중할 뿐 ‘한국사회 적응문제’를 본격 논의하지는 않고 있다.
경남대 윤대규 교수(북한학과)는 이에 대해 “탈북자에 대한 현재의 정책은 미봉책”이라며 “대량탈북의 파급효과 등을 시급히 토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이나 조선족 브로커들이 돈을 받지 못하면 다른 탈북자에게 떠넘기는 폐단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 입국하고도 돈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잦아지자 브로커들은 떼인 돈을 만회하기 위해 갈수록 탈북 알선비용을 높여 부르고 있다. 최근에는 선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적응훈련 2개월로는 미흡…시설도 부족▼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체류하다가 조만간 집단 입국할 예정인 탈북자 450여명은 건강검진 및 관계당국의 보안조사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 적응에 들어간다.
정부는 첫 단계인 건강검진부터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 이들이 탈북 후 극도의 위기상황을 겪으며 중국 대륙을 종단해 ‘해당국가’로 탈출했고 이후 장기간의 집단생활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어 정부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450여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 분산 조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관계기관의 합동신문단은 이들의 정확한 탈북 경위와 경로, 북한 내 생활, 대공(對共) 용의점 여부를 집중 확인한다.
탈북자들에 대한 조사는 보통 1, 2주일 걸리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탈북일 경우에는 조사기간이 1, 2개월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번 탈북자 가운데 북한 노동당이나 내각 군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면 별도의 조사가 실시된다. 국가정보원장은 조사 완료 후 이들을 ‘특별관리 대상자’로 지정해 별도의 ‘안전가옥’에서 머물도록 한다.
다음 단계는 통일부에서 주관하는 적응교육. 통일부 산하 탈북자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입소해 2개월간 합숙교육을 받게 된다. 통일부는 그러나 “경기 안성시 소재 훈련시설의 장소 부족으로 대체 공간 마련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원은 한국의 풍습, 외국어, 자동차 운전, 자본주의 경제교육 외에도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화’ 과정을 제대로 익힌다는 것은 무리에 가깝다는 지적이 많았다는 점에서 통일부는 효과적인 적응교육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26일 “단순한 지식 전달보다 시간 약속의 중요성, 직장인의 업무자세 등 교과서에서 배우기 어려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기업에 취업한 탈북자들이 출근 도장을 찍은 뒤 적당히 시간을 때워도 국가가 부족하나마 의식주를 해결해 주던 북한식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해 적지 않은 갈등을 빚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원 교육을 마친 탈북자는 정착금을 받는다. 현행 ‘북한 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1인 가구가 정착할 때 3590만원, 부부가 정착할 때 4400만∼4500만원이 지급된다.
정부는 그러나 23일 초기 지급 규모를 2000만원선으로 줄이는 대신 이후 취업인센티브를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꾸기로 했다. 이번에 집단 입국하는 450여명이 11월부터 실시되는 새 지원 방안의 첫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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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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