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부산에서 열린 ‘반민특위 56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신기남(辛基南)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거침없는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날 오후 신 의장은 경남 창원시의 수출기업체 방문을 마치고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그는 보좌진으로부터 부친의 친일전력을 폭로한 신동아 보도내용을 처음 보고받았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1시간 동안 신 의장은 줄곧 창 밖만 내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빗발쳤지만 받지 않았다.
신 의장은 이어 기자회견을 자청해 부친의 일제강점기 헌병 복무 사실을 시인했다. “독립투사와 유가족에게 사과와 용서를 구한다. 언젠가는 밝히려 했는데 이제 기회가 됐다”는 그의 말에서 그동안의 ‘마음 고생’이 배어 나왔다.
17일 오전 7시반. 울산지역 시민단체들과의 조찬 모임에 모습을 드러낸 신 의장은 전날에 비해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이어 울산지역 기자간담회에서는 “친일 진상규명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 내외에 퍼진 사퇴설에 대해서는 “당의 중지를 모으고 가볍게 처신하지 않겠다”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태도는 17일 오후 부친으로부터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증언을 담은 본보가 나온 뒤 급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도를 접한 신 의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이후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그는 김부겸(金富謙) 비서실장 등 측근들과 긴급대책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마음을 정리한 뒤였다.
한편 신의장의 부친 신상묵(辛相默)씨는 1964년 ‘지리산 도벌사건’으로 검찰에 의해 구속 수감됐던 사실이 17일 확인됐다.
당시 부산지검 김인규 부장검사는 1964년 12월 21일 서남(西南)흥업 고문인 신씨(당시 47세)를 산림법 위반 및 국유재산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한 후 부산교도소에 수감했다고 발표했으며 이 사실은 당시 신문에 신씨의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됐다.
검찰에 따르면 신씨는 삼성(三成)흥업에서 벌채 허가를 맡아 서남흥업에 도급을 주었다가 다시 남선(南鮮)목재에 ‘프리미엄’을 받고 넘겨준 배후 인물로 지목됐다.
신씨는 원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다음 해인 1965년 8월 31일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10일 대법원 선고공판에서 다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지리산 국유림 내 벌채허가를 받은 기업들이 불법으로 아름드리 생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낸 사건으로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권력 고위층의 인척들을 포함해 현직 공무원들이 대거 연루돼 사회적 관심을 끌었고, 특히 사건의 주체인 서남흥업은 과거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 출신의 지방 유지들이 중심이 된 기업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부산=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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