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활성화를 통한 경기활성화’ 대 ‘개혁드라이브’=이헌재(李憲宰)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올해 2월 취임한 뒤 ‘기업부민’(起業富民·기업을 일으켜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시장 친화적으로 바뀌었다는 시각이 유력했다.
그런데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한 뒤 여권에서 “민생경제가 급하다”는 지적과 함께 ‘개혁’과 ‘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탄핵정국에서 복귀한 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위기를 확대해서 조장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며 ‘개혁’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노 대통령은 이어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미래의 성장잠재력을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단기 부양책을 쓰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경기 부양을 둘러싼 혼선=‘균형’과 ‘빈부격차 해소’를 강조하며 지난해 10·29정책 등 강도 높은 부동산정책을 주도해 오던 이정우(李廷雨)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 부동산 정책 총괄 조정권을 내놓으면서 정책기조가 성장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 위원장 대신 부동산경기 연착륙 필요성을 강조해 온 이 부총리가 부동산정책 총괄 조정권을 맡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도 8월 12일 콜금리를 13개월 만에 전격 인하했다. 바로 다음 날인 13일 노 대통령은 “합리적이고 경제원칙에 맞는 경기조절정책 수단마저 전혀 구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윤제(趙潤濟) 대통령경제보좌관도 “부동산정책이 가격안정에는 성공했지만 실수요자의 거래를 위축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정부가 제한적이지만 본격적인 경기 살리기에 나섰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선택적 경기부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정책 변화 기조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이 ‘개혁후퇴’라고 비판하자, 노 대통령은 23일 “다른 정책적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직접 챙기겠다”고 ‘강경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노 대통령은 24일에는 공무원들을 향해 “최근 일부 정책 변화를 확대해석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다.
▽정부와 여당은 일관된 신호를 보내라=전문가들은 경제에서는 무엇보다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강대 김광두(金廣斗·경제학) 교수는 “경제정책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정치권이 ‘경제살리기’보다 정치 투쟁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찬국(許贊國)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센터 소장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다”며 “필요하면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고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석(李鉉晳) 대한상공회의소 상무는 “정부와 여당이 일치된 목소리를 내야 경제의 불확실성을 해소시켜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전문가 3인의 진단▼
▽표학길(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낮은 이유는 정치권의 ‘경제 살리기’가 구호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논리에 따라 인기 영합적인 정책에 편승하면서 말로만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다는 느낌을 준다.
이래서는 기업 투자도 살아나지 않고 정부 정책의 불신만 깊어질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은 경기 회복을 통해 차곡차곡 성장을 하고 있는데 한국만 주저앉아서 성장 잠재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 경제를 살렸듯이 이제는 정치 투쟁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경제 살리기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놓아야 한다. 정치 논리에 대항해 경제 논리를 펼치고 국민, 기업, 노동조합 등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권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 수준의 국가가 3만달러 수준의 복지와 노동 정책을 채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성일(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현 정부가 확실한 비전을 정하지 못해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 것 같다. 서로 모순이 되는 비전이 뒤섞여 있다. 시장경제가 대세인 개방경제 상황에서 아직도 여기에 걸맞은 분명한 비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라는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우선순위도 문제다. ‘과거사 규명’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사’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엉뚱한 문제들이 우선순위가 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시장 참여자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지금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은 성장잠재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특히 지금은 중국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적어도 ‘한국이 중국보다 투자환경이 나쁘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정치권이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복거일(소설가·경제평론가)
집권세력은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없다. 다만 기존 세력과 권위에 대한 안티(anti·반대) 감정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개혁을 하겠다는 말은 많이 나오는데 준비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집권세력이 들고 나온 과거사 규명 문제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념적 지지 세력이 선호하는 정책을 쓸 경우 현실에서는 난관에 봉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장친화적으로 돌아서면 반대로 지지층의 강한 반발에 부닥친다. 그래서 정책이 ‘가장 저항이 작은 방향(the line of least resistance)’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정책은 표류하고 대증요법에 의존할 우려가 있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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