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후보 중 한 사람인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1898∼1959)에 대한 대응은 그 단적인 사례로 꼽힌다. 보훈처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뒤 죽산에 대해 ‘아예 서훈 신청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가 1일 열린우리당 신학용(辛鶴用) 의원에게 제출한 ‘독립유공자 결정이 보류된 사회주의 경력 독립운동가 113명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러나 죽산의 명예회복을 추진해 온 창녕 조씨 문중에서는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서훈 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당시 서훈 신청 실무를 맡았던 조인환(曺仁煥·71)씨는 2일 “보훈처에서 현행 상훈법상 독립유공자 포상대상이 될 수 없다며 신청을 반려했다”면서 1995년 7월 13일자 보훈처장 명의의 회신 공문을 제시했다.
현행 상훈법 8조 3항은 ‘사형,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죄를 범한 자’의 서훈을 박탈하도록 돼 있다.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 부의장 등을 지낸 죽산은 6·25전쟁 이후 진보당을 창당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으로 떠오른 뒤 간첩혐의로 체포돼 1959년 2월 27일 사형언도를 받았고, 7월 30일 재심청구가 기각되자 재재심 청구 기회도 쓰지 못한 채 바로 이튿날 처형됐다.
학계에서는 죽산이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결성의 핵심적 인물이었으나 8·15광복 전 이미 사상전향을 했다고 보고 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했으며 3대 민의원 선거에서 ‘우리의 당면 과업-대공산당 투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는 등 공산주의와는 거리를 유지했다.
정치권에서도 죽산의 사형을 ‘정치적 타살’로 보고 1991년 국회의원 88명이 특별사면 청원안을 마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법률상 대통령의 사면권이 죽은 사람에까지 미치도록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결국 죽산에 대한 서훈은 역사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법리 해석상의 문제로 유예돼 온 셈이다.
죽산에 대한 재재심 청구를 준비 중인 창녕 조씨 문중 대표들은 노 대통령의 발언 이후인 지난달 27일 보훈처를 찾아가 “상훈법의 삭탈규정은 서훈이 이뤄진 다음의 문제”라면서 “훗날 삭탈을 하더라도 일단 서훈부터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측은 대통령의 발언을 의식한 듯 1995년도의 태도를 바꿔 이들에게 서훈 신청서를 내도록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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