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위 시절式‘대입개선안 발표’▼
그러나 정작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입시 개선안의 내용보다도 그러한 내용을 공표하는 정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그날 저녁 뉴스를 통해 교육부 발표를 보며 1980년 국보위 시절 과외금지 조치를 발표하는 장면이 겹쳐진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인가. 1980년대 초에도 사교육 문제는 온 국민의 골칫거리였다. 당시 정통성 문제로 고민하던 집권세력은 교육문제에 대한 특단의 처방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판단해 군사작전 하듯 과외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권위주의 정권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정책 추진 방식이었다.
그런데 민주적 정권 교체가 네 차례나 진행된 오늘날 어떻게 비슷한 풍경이 되풀이되는가. 8월 27일자 신문들을 보면 익명으로 등장하는 교육부 관리들의 경고성 발언이 실려 있다. 새 입시안에 저항해 본고사 성격의 시험을 실시하거나 고교 등급을 차등화하는 대학은 강력히 제재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또한 20여년 전 분위기와 너무 흡사하다.
물론 달라진 부분도 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가동되고 이번 개혁안의 주체도 교개위였던 것으로 이해한다. 위원회를 민간인 주도로 가동하는 의미는 당연히 과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서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토론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의들이 고등학교와 대학, 학부모와 학생 등 이해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시민들도 인지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국민에게 이번 입시안 발표는 또 하나의 비밀작전 결과로 느껴질 뿐이다. 보도를 보면 이 내용은 이미 대통령과의 토론을 거쳤고 9월 중 공청회를 가진 뒤 확정된다고 돼 있다. 지난 몇 달간 수도 이전 공청회를 보아 온 사람들은 남은 일정이 지극히 형식적 절차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러한 정책 결정, 발표 방식은 교육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포신도시 계획의 발표와 수정 과정이 그랬고 서울시의 중앙버스전용차로제 집행 과정 또한 성급하고 일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드물게 과감한 민주화를 추진하는 나라다. 이 점은 우리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10여년 민주적 정권교체를 거치며 꾸준히 반민주적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 왔다. 지방자치가 정착돼 가고 시민사회의 자율능력은 몰라보게 성장했다. 노동 관련 규제는 상당 부분 해제됐고 국가인권위원회와 헌법재판소 기능의 활성화로 시민의 기본권 보장도 선진국 수준에 접근한다.
▼열린정부 말하며 민주절차 무시▼
그러나 우리의 핏속에는 여전히 권위주의 문화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참여를 표어로 앞세운 정부의 철학은 백번 옳다. 열린 정당을 표방하는 여당의 접근 자세도 민주적 정치문화를 뿌리내리겠다는 의지가 바탕이라고 믿는다. 정부 철학과 여당 이념이 민주적 정치문화가 일상화하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라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 정책의 추진 과정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이다. 과거사 청산과 새로운 프로젝트의 진행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권위주의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군사작전 방식으로 추진되고 집행된다면 국방부 고위 관리가 민간인으로 바뀌면 무엇하고 정부 직제가 개방형으로 변한들 무슨 소용인가.
참여정부가 정책 개발과 추진 방식으로 도입한 로드맵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는 접근법이다. 기왕에 이러한 정책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국민을 ‘깜짝 작전’의 대상으로 대해선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정부, 다른 생각에도 귀를 기울이는 열린 정치가 한국 정치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재경 객원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jklee@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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