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6월의 ‘코리아:짧은 보고서’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유럽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대대적인 퍼레이드가 있었다. 그 직후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단계에 들어섰다. 소련군 총참모부가 대일전(對日戰) 작전계획을 완성한 것은 6월 27일이고, 총사령관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것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작전의 핵심적 목표는 만주에서 관동군을 격퇴시키고 만주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데 있었다. 이를 성공시키려면 우선 관동군의 증원을 방지하는 일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련군은 만주와 일본 본토간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전략지역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됐는데, 거기에 함경북도의 나진 청진 웅기 등 세 항구가 포함됐다.
소련은 이 시점부터 한반도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6월 29일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주코프(국장)와 자브로딘(부국장)은 ‘코리아:짧은 보고서’에서 한반도에 친소(親蘇)적인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후 소련의 한반도정책에 길라잡이가 되는 이 보고서는 ‘동방에서 소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는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백범을 ‘反動’으로 규정한 소련정보국
8월 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내놓은 ‘코리아의 국내외 정세에 대해’라는 보고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 보고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국국민당의 보조금을 받는 보수적인 세력’이라고 깎아내렸다. 임정의 주석 김구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반동적’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임정의 외무부장 조소앙에 대해서도 ‘김구보다는 덜 반동적이지만 친미(親美)적’이라고 평가했다.
이 보고서는 또 미국이 한반도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미국에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도 한반도에서 일정한 몫을 보장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보았다. 열강이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게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그 무렵 소련군 제1극동군은 예하 제25군이 한반도에 진공할 때 조선인들에게 뿌릴 전단과 포고문을 마련했다. 친소정권 수립 계획과 같은 소련의 구상은 숨긴 채 광복과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대와 희망을 부풀리는 달콤한 말만 늘어놓은 것이었다.
●달콤한 전단과 포고문에 감춰진 속셈
예컨대 ‘형제인 조선인들이여!’라는 전단은 ‘조선인들이여!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당신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가 당신들을 지원할 것임을 인식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인민들이여!’라는 포고문 또한 어느 곳에도 소련의 속셈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직 ‘조선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며 우리 민족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이 구절들은 뒷날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남한의 좌익들이 ‘소련의 무욕(無慾)’을 주장할 때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소련군이 웅기와 나진을 점령한 직후이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출간된 소련의 국제문제전문지 ‘노보예 브레미야(새로운 시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임정 지도자들을 비난하면서 조선은 소련의 원조를 받아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만은 결코 반소친미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치기도 했다.
●더욱 구체화되는 친소정권 수립 의도
소련군이 청진 원산 함흥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향하던 8월 23일 작성된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의 보고서 역시 같은 논지였다. 조선에서 반소적인 정치인들이 영향력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며, 조선에 반드시 친소적인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군은 38선을 공식 봉쇄했다. 8월 24일 경원선을 끊은 데 이어 25일 경의선을 끊어 남북간에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막았다. 9월 6일엔 남북간의 전화와 통신마저 끊었다. 소련군사령부는 “분단이 빚어낸 심각한 경제문제들에 관해 협의하자”는 미군사령부의 제의를 묵살했다. 미군사령부는 거듭 “석탄의 수송과 전기의 공급 및 통화의 조정 등에 관한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제의했지만 허사였다. 이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분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소련이 비협조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계기로 소련의 의도는 한층 노골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의 소련대표단을 위해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정책건의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까지 넘본 소련의 야심
이 건의서는 약 2년 후 미소(美蘇)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끝난 뒤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것과 대마도를 조선에 넘겨줄 것을 미국에 요구하라고 제안했다. 만약 첫 번째 제안이 받아들여진 상태에서 대마도가 조선에 넘어온다면 대마도까지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동해만 아니라 서해도 지배하게 된다. 나아가 제주도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지점에 놓여 있으므로 그곳을 소련 극동해군의 핵심기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소련이 이 건의서대로 미국과 교섭을 벌였었는지, 그에 대해 미국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반대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이정식 교수(정치학)가 지적했듯이 소련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을 압도하는 초(超)강대국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극동지역의 군사적 정치적 세력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뤄볼 때 소련은 북한에 군대를 진주시키기 이전부터 한반도에 대해 야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 : 81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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