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왕정의 폐지는 국왕의 처형이 아닌 제국의 몰락을 통해 이뤄졌다. 이어진 것은 식민지 통치였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는 왕정의 폐해를 거론하기보다 이국에 의해 뒤틀린 역사를 추스르기에 바쁘다. 고종이 우유부단한 서생이었는지 결연한 전략가였는지의 이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본관 앞마당 점령한 의원들 차량▼
왕정과 이국의 통치는 정리되지 못하고 간판만 바꿔달았다. 이 사회는 권위 금지 차별 통제 보안으로 빽빽했다. 대통령은 제왕처럼 군림했다. 경찰에 고문은 자연스러운 취조도구였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광화문의 가운데 칸은 대통령의 차량을 위한 것이었다.
탈권위의 시대가 왔다. 이를 통해 더욱 커져야 할 것은 국민의 권위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그 권력은 투표로 표현되고 투표의 결과는 신성한 것이다. 그 결과를 담고 있는 국회의사당은 그러기에 우리 시대의 성전이고 그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사당 본관 앞마당에는 하마비가 아닌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정일품 정이품이라고 쓰인 품계석이 아니다. 국회의장, 국회부의장, 열린우리당 당의장, 국회운영위원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이라고 새겨진 품계석이다. 그 품계석 앞에는 이들의 승용차가 서 있다. 조선시대로 치면 경복궁 근정전 안마당까지 마차가 밀고 들어선 것이다.
국회의사당 본관 정문의 한복판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다. 그 길은 국회의원 전용이다. 비표가 있는 기자나 관련 공무원은 옆문으로 들어간다. 비표가 없는 시민은 건물의 뒤로 돌아 지하 1층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시민들은 위험하고 냄새나는 식민지 백성인가보다.
세상은 바뀌었다. 광화문으로는 시민도 관광객도 드나들 수 있다. 청와대 앞길도, 앞마당도 개방되었다. 서울시청에는 제재 아닌 안내를 받으며 드나들 수 있다. 그러나 시대의 뒤에 처진 건물들이 여전히 있다.
정부청사들의 앞마당은 아직 철옹성이다. 수문장들이 길을 막고 그 안에는 공무원들의 쇠마차가 가득하다. 안전이 중요한 건물이어서 빈틈없는 보안검색이 이뤄져야 한단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공무원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허술한 검문이 아니고 수뢰 혐의다.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중단시켜 온 것은 테러에 의한 상해가 아니고 선거법 위반이었다.
관공서 건물의 권위적 형태와 크기에 대한 비난은 많다. 권위는 건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족한 권위를 건물을 통해 채워 넣으려던 권력기관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팔을 비틀리면서 그런 건물을 만들어낸 건축계에 사회가 돌을 던지면 건축계는 맞아야 한다. 그렇다고 건물을 아침저녁으로 허물고 새로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건물을 이용하는 방법은 바꿀 수 있다.
▼시민 홀대하는 ‘권위의 건물’▼
자동차는 마당 아래 세워 둬야 하고 시민들이 가운데 문으로 들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능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이들 건물이 지닌 상징적인 힘 때문이다. 이곳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뽑은 선민(選民)은 하늘이 내린 선민(先民)이 아니다. 국회의사당 엘리베이터에서 ‘의원전용’의 문구가 떨어졌다.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국회의원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 존경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요된 차별이 아니라 시민의 자발적인 양보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국회의사당이 신성한 공간이기를 원한다. 그 앞마당은 주차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말에서 내려 걸으라. 문의 한가운데로 시민과 함께 들어서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서현 한양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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