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친일규명法 개정안]親與인사 독무대 될수도

  • 입력 2004년 9월 13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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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상정한 친일진상규명법(약칭) 개정안의 조사 절차는 사법적 성격을 지닌다. 동행명령장 발부와 거부시 처벌 등이 그렇다. 판정 결과 또한 사법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조사대상자나 유족 및 자손에게 형벌 이상의 오점과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재심 절차도 없이 한번 결정되면 ‘역사적 진실’로 굳어질 수 있다는 점에선 재판보다도 가혹한 측면이 있다. ‘역사 재판’이라 할 수 있는 친일 진상규명은 범죄재판보다도 엄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 구성부터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개정안은 위원들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마저 기존법보다 크게 약화시켰다. 위원들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자격요건은 아예 없애버렸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여권의 영향력 행사가 훨씬 용이해졌다는 것이다.》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의 함정

3월 국회에서 통과된 기존법은 대통령이 ‘국회의 추천’을 받아 진상규명위원을 임명토록 했는데, 이 역시 사법적 권한을 가지는 다른 국가기관에 비해서 공정성과 독립성 보장 측면에선 미흡했다. 그런데도 개정안은 단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만 얻어 진상규명위원 9명 모두 임명토록 함으로써 공정성과 독립성 보장을 더욱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여당이 다수당인 상황에서 국회의 동의는 요식행위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정안은 사실상 여권의 입맛대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 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념적 정파적 시각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일고 있는 것이다.

○헌법기관들은 어떻게 구성되나

개정안의 진상규명위원회 구성 방식은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공정성과 독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헌법기관 구성 방식과 비교해 봐도 얼마나 허술한지 잘 알 수 있다.

대법원의 대법관 13명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토록 해 2중의 여과장치를 두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우엔 각각 9명의 재판관과 선관위원 가운데 3명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3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골라서 임명할 수 있는 재판관과 중앙선관위원은 3명뿐이어서 입법 행정 사법의 3부에 권한을 균등히 배분하고 있다.

○다른 국가기관들은 또 어떨까

그뿐만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위원 11명 중 국회가 4명을 선출하고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도록 해 대통령 몫은 4명뿐이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도 위원 9명 중 3명은 국회의장에게, 3명은 대법원장에게 추천권을 추고 있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처럼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받아 위원 전원을 임명토록 한 것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정도뿐이다.

헌법기관은 물론 대다수 국가기관이 임명 절차를 엄격히 하고 지명권이나 추천권을 분산시키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는 사안을 다룰 때 다양한 시각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인 것이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검토한 한 중견 판사가 “정치적 행위와 결단은 궁극적으로 타협과 합의의 산물인데 개정안은 위원회 구성부터 타협과 합의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위원들 자격 요건은 왜 없앴나

기존법에 진상규명위원의 자격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역사고증 사료편찬 등의 연구활동에 10년 이상 종사한 사람 △공인된 대학에서 전임교수 이상의 직에 10년 이상 재직한 사람 △판검사 군법무관 변호사로 10년 이상 재직한 사람 △3급 이상 공무원으로 역사고증 사료편찬 등과 관련된 업무에 5년 이상 재직한 사람 가운데 각각 2명 이상을 임명토록 돼 있다.

그러나 개정안은 이처럼 상세한 자격 요건 조항을 모두 없애고 막연히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라고만 규정하고 있다. 위원장도 기존법은 위원들의 투표로 선출토록 했으나 개정안은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또한 기존법은 ‘광복 이전 친일 반민족행위와 6·25전쟁 기간 중 친공 반민족행위를 한 부모나 조부모를 둔 사람은 위원으로 임명할 수 없도록’ 했으나 개정안은 이를 삭제했다.

○비전문가들의 위원회 장악 우려

이에 따라 전문성이 부족한 정치권 인사들이 위원으로 대거 임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아울러 대통령의 위원회 구성 권한이 강화됨으로써 진상규명의 정치성 논란도 한층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 판사는 “관련분야 연구나 법조 경력 등 구체적인 자격 요건을 두지 않은 채 대통령의 시각이 과거사 조사의 유일한 임명 기준이 된다면 임명권자의 역사관에 맞는 인사들로 위원회가 구성되고 조사의 편향성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신일철(申一澈) 고려대 명예교수도 “역사적 사건에 국가권력이 개입해 결론을 내리면 당파성 논란으로 나중에 다시 뒤집히는 것이 동서 각국의 경험이다”고 말했다.

주요 국가기관 구성방식 비교
기관위원(대법관 재판관) 수위원 임명방식위원장(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선임방식
대법원대법관 13명, 대법원장 1명대법관은 대법원장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
헌법재판소재판관 9명(재판소장 포함)국회에서 선출하는 3명,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명,대통령이 지명하는 3명으로대통령이 임명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재판관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 9명대통령이 임명하는 3명, 국회에서 선출하는 3명과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명으로 구성위원 중에서 호선
국가인권위원회위원 11명 국회가 선출하는 4명, 대통령이 지명하는 4명,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명으로 대통령이 임명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 9명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위원 9명국회의장과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각 3명과 대통령이 지명하는 3명으로 대통령이 임명위원 중에서 호선
친일진상규명위원회(기존법)위원 9명국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위원 중에서 호선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개정안)위원 9명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위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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