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초기지원 1300만원으론 부족”

  • 입력 2004년 9월 20일 18시 21분


“나가서 돈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드세요.”

10일 경기 안성시의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 졸업식(59기)을 끝으로 한국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디는 탈북자 152명에게 하나원 관계자는 ‘돈 빌리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정부가 일시불로 지급하는 초기 정착지원금 1300만원으로는 서울지역 임대아파트를 빌리기에 약간 부족하기 때문.

한국에 연고가 없는 유진씨(가명·44)는 ‘부족분’ 40여만원을 빌리지 못했고 결국 다른 졸업생들이 떠난 뒤 홀로 하나원에 남았다.

벌써 열흘째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계속될지도 알 수 없다. 유씨처럼 돈을 구하지 못한 졸업동기생 3명은 무턱대고 하나원을 나가 일단 아는 사람의 집에 얹혀살다 최근에야 돈을 마련해 ‘잠자리’를 구했다.

▽자본주의 벽에 부닥친 탈북자들=탈북자 5000명 시대를 넘어서면서 하나원 졸업이 ‘한국사회 정착의 증명서’가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다른 탈북자에게 100여만원을 빌려 서울 Y구에 겨우 보금자리를 마련한 최모씨(32·올해 7월 입국). 그는 초기 정착금을 아파트 임대에 모두 쓰는 바람에 요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해 보겠다며 생활정보지에 나온 13곳에 전화했지만 투박한 북한 말씨 때문에 매번 거절당했다.

갓 정착한 탈북자들은 거래 실적을 따지는 은행에서 대출도 받지 못한다.

이모씨(42·올해 7월 입국)의 사정도 마찬가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아파트 인근의 재활용품 수거함에서 고장난 냉장고를 가져다 수리한 것. 이씨는 “하나원을 졸업한 뒤 거지생활을 할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다.

▽탈법 부추기는 탈북자 관리=대량 탈북시대가 왔지만 하나원의 교육은 구태의연하다. ‘홈쇼핑’ ‘마트’ 등 외래어를 탈북자에게 가르칠 뿐 정작 자본주의에 적응할 소양이나 기술교육은 하지 않고 있다. 하나원을 졸업해도 탈북자들은 한국 사회의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돈이 궁해진 상당수 탈북자에겐 편법이 횡행하고 있다. 정착금이 지급되는 통장을 고리대금업자에게 맡기고 그 액수의 절반을 미리 ‘할인’ 받아 사용하고 있는 것.

생존 문제에 부닥친 탈북자 중 일부는 범죄의 유혹까지 받는다. 10일 전 하나원을 나온 이모씨는 “일자리가 없고 저녁도 못 먹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진퇴양난의 정부=정부도 딜레마에 빠졌다. 일시불로 정착지원금을 지급하면 이 돈이 브로커의 손에 넘어가 또 다른 대량 탈북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지원금액을 낮춘다면 탈북자들은 조기 정착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누가 희생될지는 정부의 선택이다.

당초 탈북문제 주무부처는 국가보훈처였다. 체제 경쟁을 할 때는 탈북자를 ‘귀순용사’로 대우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식량난으로 탈북이 시작되자 주무부처가 보건복지부로 바뀌었고 탈북자 1만명 시대가 예상되자 통일부가 업무를 떠맡았다. 탈북문제를 남북사회 통합의 시험대로 인식한 것.

정책기조도 금전적 지원보다는 자립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정부 관계자는 “탈북자에겐 돈을 주는 것보다 자립능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책의 ‘총론’은 바뀌었어도 탈북자의 자립을 위한 구체적 변화는 없다. 탈북자들이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기간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하태원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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