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담론만 무성
‘분권 혁신 참여 자율 평등….’ 노무현 정부 핵심인사들이 강조하는 키워드들이다.
그중에서도 분권과 정부혁신은 노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해 온 개혁의 수단이자 목표. 골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해 권력기관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직사회에 민간기업 못지않은 경쟁체제를 도입하며 △공직사회를 감시, 견인하기 위한 외부 전문가나 시민의 국정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정부 부처별 혁신담당관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혁신방안을 마련해 자율적 추진을 독려하고 있다”며 정책평가 내실화, 성과주의 인사시스템 구축, 회의운영방식 개선 등을 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상당수 공무원들은 여전히 분권과 혁신의 구체적인 내용을 머릿속에 담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 근무하는 한 정부부처 과장은 “담론은 거대한데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위에서는 알아서들 잘 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밑에서는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일부 부처에선 ‘혁신 지상주의’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경제 부처 공무원은 “혁신담당관실에서 1주일에 한번씩 숙제를 내준다. 최근에는 두툼한 영어 원서를 주며 독후감을 내라고 했다. 숙제를 하느라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연세대 나태준(羅泰俊·행정학) 교수는 “정부혁신, 정책에 대한 엄밀한 평가, 분권은 세계적인 화두로 방향은 맞다. 그런데 혁신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무조건 새로운 것만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옥상옥 국정운영
노 대통령은 이해찬(李海瓚) 총리에게 일상적 국정운영을 위임하고, ‘분야별 책임장관제(팀제)’를 도입했다. 또 12개 국정과제위원회로 하여금 장기적인 국가전략과제를 정립토록 하고 있다.
실제 분권형 국정운영시스템 도입 이후 청와대와 총리실의 정보 공유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업무 영역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총리 비서실의 한 간부는 “현재로선 감(感)에 의해 일을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책임장관제를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다. 정부 일각에선 “전문성과 판단력이 필요한 정책 입안과 수립은 실무진이, 결정은 장차관이 전담하는 게 옳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처간 조율 기능은 차관회의와 국무회의로도 충분한데 공연히 옥상옥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
‘민간기업처럼 최고경영자(CEO·장관)에게 자율권을 준다’고 하면서도 ‘책임장관→총괄총리→대통령으로 이어지는 3중 통제 조정기구’를 두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 정부 들어 위상이 강화된 각종 위원회 등을 놓고도 평가가 엇갈린다. 교육혁신위원회의 경우 학생들의 학력은 물론 평소 생활태도 등 모든 정보를 담은 ‘교육이력철’을 만들어 이를 대학입시의 중요한 평가 수단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대입제도 개선안을 마련했으나 현실성이 떨어져 백지화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과거처럼 담당 부처에 의해 모든 정책이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 전문가나 이익집단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정부에 아이디어를 제공해 국정의 ‘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그러나 위원회의 각종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현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령탑 부재
정부중앙청사에 근무하는 한 간부는 “장차관 회의를 들어가도 꼭 좌담회하는 분위기다. 회의가 끝나도 그날 논의된 정책현안이 결정이 난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장관들도 과거와 달리 자신이 최고정책결정권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각 권력기관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실세를 향한 권력의 집중을 막고 부패의 고리를 차단하겠다는 뜻에서다. 하지만 국정운영이 중구난방(衆口難防)식으로 이뤄지고 있고,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분권형 자율적 국정운영시스템이 도입됐지만, 공직 사회가 오히려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상황도 감지된다.
여권 내에서도 특정 현안에 대해 한창 논란이 벌어지다 노 대통령이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마디 하면 상황이 종료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출자총액제한제도나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둘러싼 여권의 교통정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총리의 한 측근은 “과거의 잣대나 가치관으로만 보면 현 정부의 국정시스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정운영시스템이 정비되는 과정이다. 연말쯤 되면 청와대와 총리실의 업무분담이 분명해지고, 국정 방향도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건국대 이성복 교수(행정학)는 “분권형으로 국정을 운영하더라도 권력의 중심은 있어야 한다. 현 정부는 사령탑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교수도 “권력의 중심은 대통령이다. 결국 최종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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