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원식]보수의 위기, 진보의 위기

  • 입력 2004년 10월 3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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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나온 ‘조태일시선집’을 읽는다. 1999년 가을, 서둘러 우리 곁을 훌쩍 떠난 조태일(趙泰一) 시인의 5주기를 추념하며 원로시인 신경림 선생이 정선(精選)한 이 선집을 읽으며 새삼 조 시인의 그 무사기(無邪氣)한 마음의 끝자락을 좇는다. 어두운 시대를 겪어온 분임에도 타고난 자비심에서 우러난, 천진한 장난꾸러기 같은 심성을 잃지 않았던 시인의 풍모가 난세에 더욱 그립다. 그의 시세계를 다시 추보(趨步)하면서 독재에 대한 그의 저항이 한갓 증오가 아니라 큰 긍정에 기초한 따듯함에서 연원했음을 깨닫는다.

▼제1야당은 과거로 회귀하고▼

1990년 봄 그는 노래한다. “오는 봄은 오는 길이/높으나 낮으나 탓하지 않고/다만 몸을 낮추며 온다.” 남 탓하지 않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수선을 피우지 않고도’ 봄은 ‘이렇게 많은 생명을 일깨우며’ 그리고 ‘이렇게 헐벗은 생명을 감싸며’ 문득 우리 앞에 도착하는 것이다. 겨울을 이기는 봄의 겸허하고도 눈부신 역사(役事)에 한국사회의 소망을 가탁(假託)한 대단한 깨달음의 시다. 우리가 오늘날 번잡 속에 잊은 것을 경각시키는 바 크다.

낙관주의자들조차 한국사회의 현황에 우려를 품기 시작했다.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변개(變改)하려는 위험세력으로 낙인찍고,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을 개혁의 발걸음에 딴죽을 거는 훼방꾼으로 매도한다. 마치 ‘두 나라’처럼 갈라서서 사사건건 사납게 으르렁거리기만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제1야당에 새 체제가 들어서면서 야당다운 야당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두었던 국민은 다시 씁쓸하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집권의 문턱에서 연속 좌절했던 경험들을 어느 틈에 잊었다. 여당이 죽을 쑤니까 그 반사이익에 눈이 가려 국민통합적인 수권정당으로 가는 각고의 자기개혁을 벌써 방기하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꼴이다. 철지난 레코드를 계속 틀어서야 보수의 위기는 치유되지 않는다. 개혁적 보수를 내걸고 건강한 보수를 건설하겠다는 그 기치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어제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다만 어제를 또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제1야당의 개혁노선이 시나브로 사라진 데는 여당도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이 리더십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했다면 이 지리멸렬한 정쟁상태를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보수의 위기는 진보의 위기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당이 지금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때는 드물었다. 집권은 했지만 원내 소수당으로 고전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여당은 원내 과반의석을 가진 다수당으로 의회 권력까지 쥐고 있다. 더구나 당분간 선거가 없다. 나라를 끌고 갈 큰 그림과 작은 그림들을 마련하고 국민과 야당들에 호소하고 토론을 통한 합의를 이끌어 21세기의 한반도 구상을 착착 실천에 옮길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 황금기를 작은 전투들로 허비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국가보안법 개폐, 친일진상 규명작업, 수도 이전. 이 3대 현안이 어느 틈에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을 보노라면 원숙한 정치력 부재가 뼈아프다.

▼여권은 작은전투로 허송세월▼

그런데 진보의 위기는 비단 정치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시민사회에서도, 아니 나라 전체에서 공을 내세워 진지를 차지하려는 각개전투들이 처처에서 벌어진다. 물론 목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들은 보스들이 지배했던 과거로부터의 탈각(脫殼)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냉전의 섬’으로 격절(隔絶)되었던 한국이 ‘평화의 축’으로 거듭나기 위해 치르는 ‘고통의 축제’인 것이다. 그러나 성인식의 축제는 짧아야 한다. 우리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 가을, 만년의 조 시인이 도달했던 자비심의 고갱이를 음미하자.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주변 환경을 침통하게 사유하면서 진정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순정한 마음으로 21세기로 가는 든든한 기관차를 함께 창조할 때가 아닐 수 없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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