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는 “핵과 미사일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하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북한엔 활용도가 높은 반면, 미국과 일본 등엔 ‘노 정권에 대한 의심’을 키울 발언이다. 이 말은 한미일 공조 테이블과 6자회담 석상을 계속 떠다닐 것이다. 한국의 핵물질 실험에 대한 해외 일부의 의구심에 고리를 달아 줄 우려도 있다.
▼다시 포문 연 해외발언▼
이날 연설은 ‘노무현식 민족주의’를 국내외에 각인시키는 효과와 역효과를 동시에 낳을 것이다. 그 득실 구도는 단순하지 않다. 노 정권엔 국내 정치적으로 득이 더 클 수 있고, 국민경제와 안보 등의 국익 차원에선 실이 더 클 수 있다.
노 대통령은 핵이 자위용이라는 북의 주장에 대해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원고를 읽은 뒤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수정하면서 “북한을 합리적이라 하면 미국 국민이 매우 좋아하지 않으므로”라고 토를 달았다. 그런다고 이미 내보인 속내가 증발할 리 없다. ‘미국 국민이 매우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이 말을 삼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덧씌워질 뿐이다.
지난해 6월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한 노 대통령은 일본 국민과 가진 TV 대화에서 “과거사를 생각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귀국 기자회견에선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착잡하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올 7월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서 과거사와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 문제 등에 대해 “공식 의제로나 공식 쟁점으로는 제 임기 동안에는 제기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생각대로 솔직히 모든 것을 내놓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너무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무런 소득이 없고 분위기만 나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자락을 깔았다. 현재와 장래의 국익이라는 실리를 위해 ‘과거사를 따지지 못한’ 1년 전의 착잡한 심경을 묻었다면 거기엔 국가지도자로서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 전날인 12일엔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총리가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가졌다. 영국 더 타임스 기자는 부시 대통령에게 “총리는 때때로 부시의 푸들(강아지)로 묘사되는데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고 반(半)농담조로 묻고 나서 “이라크전쟁을 전폭 지지한 대가를 영국에 지불해야 하지 않느냐”고 핵심 질문을 던졌다. 블레어 총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그렇다고(푸들이라고) 답변하면 안 된다”고 침을 놓아 회견장에 웃음을 남겼고, 부시 대통령은 “블레어 총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나는 행운아”라고 화답했다.
또 부시 대통령은 그 자리의 주역도 아닌 고이즈미 총리를 거명해 “내 친구 고이즈미 총리는 확실히 굿맨”이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을 위해,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을 위해 서로를 활용하며 윈-윈을 도모하고 있다.
▼제발 냉철하게 國益생각하길▼
청와대는 지난해 5월의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무엇보다 큰 성과는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개인 차원에서 신뢰와 존경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라고 자평했다. 노 대통령은 20일 칠레에서 다시 있을 한미정상회담에서 집권 2기를 앞둔 부시 대통령과 어떤 사이임을 드러낼지 궁금하다. 진정한 친구관계임을 보여 주고, 국익을 위한 외교력을 과시할 것인가.
대통령의 외교적 실책이나 말빚은 결국 국민이 갚아야 한다. 안보외교는 결코 국내 정략의 제물이 될 수 없다. ‘부시의 푸들’이라는 블레어 총리나 ‘부시에겐 약한 사나이’ 소리를 듣는 고이즈미 총리가 우리 정권 사람들보다 자존심과 자주 의지가 약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지는 듯 이기는 외교를 보고 싶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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