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활]유난히 추운 겨울

  • 입력 2004년 11월 28일 19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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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렸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입동(立冬)과 소설(小雪)도 지났다. 모레면 12월이 시작된다.

겨울이란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과 이문열의 ‘그해 겨울’은 제목에서부터 독자의 눈길을 끈다.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 달궈놓은 ‘겨울 연가’도 비슷하다. 러시아의 ‘겨울 궁전’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스러져간 왕가(王家)의 비극적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겨울의 이미지는 비장미(悲壯美)다. 하지만 겨울이 경제와 결합하면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춥고 쓸쓸한 고통만이 남는다.

지금 한국의 직장인들은 떨고 있다. 내수침체의 끝이 보이지 않으면서 산업계와 금융계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매출과 이익이 줄어들고 미래도 불안한 상태에서 기업의 인원 감축을 탓할 수도 없다. 많든 적든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세상이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은 더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회사에 들어가더라도 감원 한파(寒波)에 시달리겠지만 아예 기회조차 못 잡은 아픔에 비할 수는 없다. 더구나 절대빈곤을 경험한 기성세대와 달리 지금 20대는 고도성장과 핵가족화의 영향으로 부족함을 모르는 ‘왕자님’ ‘공주님’으로 커 왔다. 취직 못한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떨지.

중소기업인과 자영업자들도 더는 못 견디겠다고 울상이다. 전국의 중소상공인 대표들은 지방경제의 위기를 호소하면서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식당 음식점 옷가게 등 자영업자들이 거리로 나서 생계형 시위를 벌이는 풍경도 이제 낯설지 않다. 실질소득은 옆걸음이나 뒷걸음치는데도 세금과 준조세는 늘어만 간다.

하기야 ‘무풍(無風) 지대’도 있다. 공무원 교사 공기업 같은 공공 부문이다. 민간 부문이 아무리 어려움을 겪어도 끄떡없다. 세금으로 꼬박꼬박 봉급을 받으니 뼈를 깎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경쟁의 무서움도 남의 일이다. 일부 공무원 및 교사집단의 집단이기주의와 퇴행적 행태를 보면서 세금을 왜 내야 하는지 회의하는 국민이 급증하는 현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민간 부문의 위축과 공공 부문의 비대화는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성장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그동안 비축한 것만으로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창업 못지않게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진리는 나라경제와 기업경영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결정적 걸림돌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국민을 더 절망케 한다. 이번 장기침체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외 경제변수가 아닌 ‘정책 실패’와 ‘정치 실패’가 위기를 불러오고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경제관련 협회장을 맡고 있는 한 기업인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경제정책이 별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 경제의 겨울’을 초래한 1차적 책임이 정부에 있다면 결자해지(結者解之)할 수밖에 없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현 정부가 성장패러다임 부재(不在)와 정책 빈곤, ‘개혁 만능’의 아마추어리즘과 적의(敵意)의 리더십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 경제의 ‘유난히 추운 겨울’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도 결국 여기에 달렸다.

권순활 경제부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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