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장소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 현의 이부스키(指宿)는 19세기 후반 정한론(征韓論) 주창자들의 근거지와 가깝다는 점 때문에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광지로만 치자면 수려한 자연경관과 탁월한 온천수가 그만이다. 활화산에서 내뿜는 화산재의 영향으로 온천 수질이 좋기로 유명하고, 해변의 검은 모래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래찜질 온천욕이 가능하다. 모래에 각종 광물질이 녹아 있어 체내 노폐물 배출 등에 각별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온천 외교는 일본이 정상 간의 만남에서 분위기를 호전시킬 필요가 있을 때 꺼내드는 회심의 카드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온천에서 전통 의상 차림으로 직접 술을 따르며 대접했다. 레이건-낸시 부부의 감동은 이후 두 정상 이름의 앞 글자를 딴 ‘론야스 미일 동맹’의 토대가 됐다. 친분이 두터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다음 번 만남 장소도 아마 온천이 될 것이다.
▷온천욕의 효과가 뛰어나다고 해도 외교 현안을 압도할 수는 없다. 1997년 한일 정상은 온천 관광지 벳푸(別府)에서 만났지만 일본 정치인의 역사 망언(妄言)이 돌출하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민감한 현안이 많은 한일 관계는 상호존중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아무리 이벤트를 그럴싸하게 꾸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두 나라 정상이 마음 편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진정한 ‘미래지향적 동반자’를 위하여.
도쿄=박원재 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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