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국민은 신바람 나고 싶다

  • 입력 2004년 12월 27일 18시 24분


‘전망은 틀리기 위해 한다’는 농담 같은 말이 올해는 너무 들어맞고 말았다. 정부도 거짓말만 했다기보다는 민생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줄 예상할 능력이 안 됐던 것 같다. 삶의 질을 따지기엔 생계의 한계에 내몰린 사람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내일을 향한 기대를 버릴 수가 없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한 패가 돼 다른 자를 공격함)라는 사자성어 하나로 2004년 대한민국을 압축하기엔 희망적인 모습도 적지 않았다. 오로지 패싸움으로만 지새운 한 해는 아니었다.

▼2004년이 남긴 가능성들▼

복제된 인간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얻어 낸 황우석 교수팀의 성공은 한국 과학의 큰 가능성을 보여 줬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기술, 포스코의 제철 신기술을 비롯해 세계시장의 무한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업들의 도전도 성과가 컸다. 이런 과학기술과 기업가 정신이 5년 뒤, 10년 뒤 국민이 먹고살 것을 만든다.

대통령의 ‘기업 재발견’도 의미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올해 39일간 해외를 돌면서 기업과 기업인에게 보낸 찬사가 빈말이었을 리 없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파고든 우리 기업들을 통해 무역 강국의 실체와 부자나라의 잠재력을 확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에 비하면 국내 정치와 정치인이 우물 안 개구리 같다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대중문화 한류(韓流)가 중국 동남아를 거쳐 일본을 뒤덮고 세계화를 넘보게 된 해이기도 하다. 핵과 미사일 위협, 가짜 유골 반환은 일본인의 ‘북조선 혐오’를 키웠지만 ‘용사마’로 상징되는 한류는 일본인을 열광시켰다. 한국 영화감독들은 세계 3대 영화상을 휩쓸었다.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대상도 한국 작품 몫이었다.

한류는 문화이자 산업이다. 문화시장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한류 경제’의 새 장(章)을 여는 동력이었다. 정치와 규제가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만 않는다면 한류의 업그레이드 여지는 더 있어 보인다. ‘돈 되는 문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돈 벌게 하고 박수 많이 쳐 주면 될 일이다.

202개국이 참가한 아테네 올림픽 종합 9위도 대단하다. 88 서울올림픽 4위는 개최국 프리미엄도 있었다 하겠지만 그 후 7위, 10위, 12위, 9위로 이어진 올림픽 성적을 자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계여자프로골프대회에서 10위 안에 우리 선수 서너 명이 끼는 일은 이제 뉴스가 아니다.

나라의 미래인 15세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은 세계 최고이고 읽기 수학 과학은 2∼4위라는 국제조사 결과도 나왔다. 우리보다 서너 단계 뒤지는 평가를 받은 일본은 비상이 걸렸고, 학교 수업시간 연장 등 대책을 세우느라 바쁘다. 그런데 우리 교육이 15세의 경쟁력을 국가경쟁력으로 담아 내지 못하니 문제다.

‘죽도록 파업하는 나라’라는 악명을 지울 수 있는 희망도 조금은 생긴 한 해였다. 일부 대기업 노조는 정치적 강경 투쟁을 거부하고 민주노총과 결별했다. 한국노총 산하 노조원 중에는 전투적 운동보다 평화적 방식을 지지하는 쪽이 4배에 달했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해 정규직이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도 절반을 넘었다. 팬택 노사(勞使)의 ‘임금 덜 달라, 더 주겠다’ 선언은 노사 ‘윈윈 모델’ 대상(大賞)감이다.

▼민생 일으켜 세울 큰 정치를▼

정치권은 대체로 싸움판이었지만 그렇다고 정치 무용론(無用論)을 펼 수는 없다. 4·15 총선은 ‘돈 못 쓰는 선거’로도 민의(民意)를 물을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이제 더는 ‘차떼기 정당’을 쳐다보지 않아도 될 가능성을 높였다. 아직도 부패지수가 높은 나라의 오명을 벗지는 못했지만, 어느 중소기업 사장은 “공무원 신경 안 쓰고 추석 보낸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올해도 어김없이 본 셈이다. 국민을 더 자유롭게 하고 더 신바람 나게 하는 정치, 대한민국의 힘을 모아 내는 리더십만 가능하다면 2005년에는 민생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큰 정치가 있는데 왜 작은 정치만 하려고 하는가.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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