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는 1961년 12월 15일 일본 외무성 회의실에서 열린 제6차 한일회담 일반청구권 소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한국인에 대한 피해 보상금으로 3억640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한국은 강제 징용자 수로 총 103만2684명을 제시하고, 이 가운데 노무자가 66만7684명, 군인 군속이 36만5000명을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부상자 1인당 2000달러(총 5000만 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총 1억 2800만 달러), 생존자 1인당 200달러(총 1억8600만 달러) 등으로 계산한 것.
한국은 이후 회담에서 피해 보상금을 포함해 7억 달러를 요구했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62년 11월 12일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의 회담(김-오히라 메모)’이 돌파구가 됐다.
‘김-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금액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합의한 것이다. 이 금액은 추후 협상과정에서 상업차관 부분만 ‘3억 달러’로 최종 조정됐다.
한국은 수차례에 걸쳐 ‘청구권’이란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무상 지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일본 측이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경제협력 차원으로 회담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논란 끝에 1962년 11월 26일 회의에서 한국이 ‘한일 양국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고 규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한국은 명목으로서의 ‘청구권’ 용어를 얻는 대신 실질적으로 최종 해결이라는 양보를 택한 셈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한일협정 관련 문서엔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을 한국정부가 일괄적으로 받고 싶다고 밝힌 부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배상이 충분치 못했던 것과 관련해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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