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치과의자에 누워서

  • 입력 2004년 12월 29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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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치료를 받고 있으면 누구나 조금은 철학자가 된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도 이발소에 가면 스르르 잠이 들지만 아무리 잠꾸러기라도 치과에서 이를 뽑으며 잠자는 도사는 없다.

잠도 잘 수 없는 치과 치료대 위에선 그래서 생각밖에 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저마다 ‘진리의 순간’을 체험한다. 가령 지난 5년은 순간처럼 잠깐인데 치과 치료를 받는 5분은 5년보다 길다고 느끼며 순간과 영원의 변증법을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도로 공사처럼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입속을 후비고 파고 갈아대는 막무가내의 치과의사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영혼과 육신만으로 이뤄진 생명체가 아니라 때로는 쇠붙이 금붙이로 때우고 갈아 끼울 수 있는 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삶에도 ‘진보적인 정치’ ‘정의로운 경제’에 못지않게 그 밑바탕엔 돌덩이 같은 ‘보수꼴통’의 국방 안보가 탄탄해야겠다고 유추해본다.

▼권력중심부에 실망했던 한해▼

오늘날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 어떤 전문의보다 수익도 높다는 치과의사. 그러나 몽매했던 반세기 전 나의 대학 시절만 해도 치과대학생은 사회적 냉대를 ‘잇과’를 공부한다는 재담으로 넘기곤 했다. 하물며 수의과대학에 대한 편견에 이르러서야….

의회주의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에서도 지난 세기 초 이런 일이 있었다. 수의사 출신의 초선의원이 처녀발언을 하던 날, 연설 도중 보수당석에서 “이봐, 수의사!” 하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그러자 초선의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소. 어디 몸이 편찮으신가” 하고 받아넘겨 일격에, 그러나 점잖게 상대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시간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나 최소비용에 최대효과의 반격이었다.

세모에 치과병원의 치료대 위에서 생각이 이에 미치니 새삼 2004년 한 해의 명암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다. ‘만세, 만세, 만만세’의 수의과대학!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올 한 해 최고의 자랑과 바람을 안겨준 수의과대학의 황우석 박사! 한국이, 한국인이, 한국 과학이, 한국 문화가 세계 속에서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울 수 있게 한 황우석 박사.

또 있다. TV드라마 ‘겨울연가’가 오만한 일본에서 일으킨 ‘용사마’ 열풍을 절정으로 동남아 일대와 그 너머로 번져간 ‘한류’의 해일. 안으로는 개봉영화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하고 밖으로는 국제영화제에서 연거푸 수상한 한국 영화와 영화인들.

‘진보적인 정치’는 북한이라는 세습독재 체제 앞에서 ‘민주주의’의 신조도, ‘인민’의 실상을 볼 시력도, ‘공화국’의 ABC에 관한 상식조차 잃은 채 국회 안팎에서 4·19 직후처럼, 모든 걸 ‘데모’로 다스리는 데모-크라시(시위정치)가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고 밀어붙인 2004년.

‘정의로운 경제’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운 불황으로 기업과 가계가 고통을 겪고 신용불량자 수와 청년실업자 수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데도 속수무책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권력의 중심에 진입한 주변인들이 지금 누리는 일생일대의 호강에 눈이 어두워 만백성이 겪는 경제의 위기를 위기 아니라고 강변하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한가한 철학담론으로 치과 치료대가 아니라 권좌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배아복제-한류는 주변부 업적▼

중심부와 주변부의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수의과대학에서 쏘아올린 인간배아 줄기세포 복제기술의 개가. 잘난 사람들이 ‘딴따라’패라 부르는 젊은이들이 ‘바보상자’라 업신여김을 받던 TV방송에서 갈고닦은 재주로 세계를 사로잡은 ‘한류’ 열풍.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다같이 주변부의 등장, 주변부의 개가(凱歌)였다.

1960, 70년대의 경제발전, 1980, 90년대의 정치발전에 이어 21세기의 첫 연대에 문화발전이 이 땅에 제3의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된다면 그것은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이뤄질 것이라… 고 생각하는 동안 영원할 것 같던 치과치료도 끝나고 올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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