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기영/‘우리만의 휴머니즘’ 넘어서자

  • 입력 2005년 1월 2일 17시 34분


지난해 말 남아시아 일대의 엄청난 지진해일 재난에 세계 각국의 지원이 봇물 터지듯 하고 있다. 재해 후 누구보다도 일찍 지원인력을 파견했던 일본은 급기야 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고 유럽과 북남미, 중동 등 거의 모든 지역의 나라가 지원에 나섰다.

당초 6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던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은 ‘쪼잔함’이라는 핀잔을 듣고 부랴부랴 500만 달러로 늘리더니만, 다시 5000만 달러 지원을 논의할 것이라 한다.

겨우 수만 달러 지원에 그쳐 낯 뜨거웠던 과거 터키나 이란 지진 때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이번 남아시아 지진사태가 엄청난 규모의 재해였고 많은 수의 한국인 피해자가 포함됐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대응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한 해의 해외재난구호금 예산을 100만 달러 수준으로 정해놓고 있는 정부나, 민간복지기금의 홈페이지에 이번 사태를 위한 모금 배너 하나 제대로 없는 시민사회나, ‘왜 남의 나라 일에 우리가 모금해야 하느냐’고 흥분하는 개인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해외원조에 인색한 한국▼

‘우리’가 아닌 것에 대한 태도는 일관적이게 소극적이다. 이 상황에서는 영국의 구호단체들이 정부 지원금액의 약 2배에 해당하는 6000만 달러를 단 이틀 만에 모았다는 뉴스가 우리에게는 경이롭게 다가온다. 최근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곧 1000억 원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지만, 이번 지진사태를 돕기 위한 모금은 얼마나 되는지 관련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단순히 돈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우리’식 휴머니즘은 아직도 혈연적 가족주의라는 유교 문화 속에 침잠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것은 강력한 가족결속력으로 사회 안정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대외적으로 집단적 친소(親疎)를 구분 짓고 안으로는 내부구성원에게 맹목적 협력과 부양책임을 강요하는 기능을 해 왔다. 지역과 혈연, 학연을 매개로 한 집단구분이 그 대표적 산물이다. 외국인근로자, 중국동포, 북한이탈주민과 같은 새로운 이웃들에 대한 차별적 구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대내적인 의무와 책임은 가족 및 부모 부양의 책임을 가족구성원에게 지움으로써 무한의 희생과 부담을 감내하게 만들며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방임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을 수 있는 ‘우리’식 휴머니즘은 결국 ‘우리’ 밖의 외부구성원뿐 아니라 내부구성원의 존엄과 복지적 권리까지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지구촌 시대라는 정서적 국제화와도 조화를 이루기 어려우며, 세계화라는 자본의 전략적 국제화 가운데서도 생존하기 힘들다.

유럽 제국들의 저개발국 원조행위는 상품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기업의 전략적 투자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우리’식 폐쇄가 아닌 ‘나’의 자율과 합리에 기반을 둔 개방적 삶의 방식과 근본적 인도주의 실천에 걸림돌이 돼서는 곤란하다.

▼글로벌 휴머니즘 지향해야▼

현실을 직시해 보면, 이미 자본과 노동을 다국적화하고 상품시장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해가며, 한편으로는 이웃나라에서의 문화 ‘한류(韓流)’ 열풍을 은근히 즐기는 우리가 국가 경계 너머의 삶의 고통에 무감각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비판하는 글로벌리즘의 부작용을 가장 천박하게 실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아시아 지진사태를 계기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우리’ 식 휴머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다.

이기영 부산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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