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본격 조사]실체 접근 못한채 정쟁만 심화 우려

  • 입력 2005년 2월 3일 18시 09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동백림 사건을 비롯한 7개 사건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안철민 기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동백림 사건을 비롯한 7개 사건을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안철민 기자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과거사 파헤치기’에 시동을 걸었다.

여권은 지난해 4·15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 뒤 과거사 문제를 본격 제기했다. 이후 지난해 10월 ‘진실 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 제정안’(과거사기본법)을 발의했지만 여야 간 논란 끝에 이 법안은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그러나 국회 차원의 과거사 규명을 위한 입법화 작업과 별개로 정부 차원의 과거사 규명작업은 계속 추진돼 왔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30일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활동 결과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처음 과거사 규명 의지를 천명했고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국가기관이 먼저 ‘자기고백’ 방식의 진상규명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실제 노 대통령의 과거사 드라이브는 훨씬 이전부터 깊숙이 논의됐던 것 같다. 지난해 11월 5일 고영구(高泳耉) 국가정보원장은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대통령의 과거사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받아 6월부터 과거사 진상규명을 계획했다”고 말해 과거사 규명 문제가 적어도 지난해 6월부터 내부적으로 논의됐음을 시사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 때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국회 청문회가 실시됐고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12·12쿠데타, 5·17쿠데타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이뤄지는 등 역대 정권에서도 과거사 규명작업은 있었다.

현 정부의 과거사 드라이브는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朴正熙) 정권을 정면으로 조준하고 있다. 3일 국정원 진실위원회가 선정한 7개의 우선 조사대상 중 5건은 박 정권 때 벌어졌던 사건이다.

여권 내에서는 과거사 규명을 현 정부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라고 말한다. 현재의 집권 세력이 박 정권 때부터 독재에 저항해 왔다는 점에서 숙명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의 과거사 드라이브에는 주류세력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숨은 의도가 깔려 있다는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 않다. 1998년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출범으로 사실상 선거에 의한 첫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를 30여 년 동안 지배했던 주류세력은 1960, 70년대 산업화 세력이었고 과거사 드라이브는 바로 이 세력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일장학회 강제헌납사건이 우선 조사대상에 포함된 것은 정치적 시비를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사장직 사퇴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부일장학회의 후신인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1995년부터 맡아 왔다. 이 때문에 야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 대표 때리기’의 일환이라는 지적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조사의 실효성도 문제다. 예비조사 과정에서도 의혹을 밝힐 만한 자료가 국정원 내부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체적 진실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정쟁만 심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경제가 어려운데 ‘과거’ 문제로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냐는 비판적 여론도 현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DJ납치-정수장학회 조사…과거사 우선규명 대상 7건 확정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吳忠一 목사)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우선 조사 대상 사건 7건을 선정해 발표한 뒤 민관합동으로 이들 사건에 대한 본격 조사에 착수했다.

대상 사건은 △1, 2차 인민혁명당 및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 △KAL 858기 폭파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 매각 사건(일명 정수장학회 사건) △동백림 사건 등이다.

위원회는 안병욱(安炳旭) 가톨릭대 교수와 김만복(金萬福)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을 민관 간사로 하는 15인의 민관 합동위원과 20명의 조사관으로 구성됐으며 2년 동안(1년 연장 가능) 조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안 교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로 국정원 보유 자료에 기대를 걸었지만 자료가 충분치 않아 기대한 만큼의 진실 접근이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진상규명작업의 애로를 실토했다.

오 위원장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국정원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의혹 사건 가운데 사회적으로 의혹이 큰 사건과 시민·사회단체, 유가족 등이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사건을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위원회의 사건 조사는 일단 국정원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하되 검찰 경찰 국군기무사령부 등 외부 기관의 자료 협조 병행, 사건 관계자의 면담을 통한 고백과 증언 청취의 방법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진실위원회는 의혹이 제기된 90여 건의 사건에 대해서도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이미 선정된 우선 조사 대상 사건의 조사 진행 상황을 감안해 계속 선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