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적어도 200년 가까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어 100년 넘게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17년에 제정러시아가 붕괴되는 기회를 잡아 독립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전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그 뒤에도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살아야 했다. 이 국가적 시련 속에서 핀란드는 울분의 폭발이나 과격한 대응보다 때로는 굴욕도 견뎌내는 참을성, 그리고 신중하면서도 절제된 대응이 자신의 생존에 결정적 요소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실리 위주의 침착한 외교와 짝을 이룬 것이 내정에 있어서 ‘내실을 중시하는 국력의 배양’이었다. 국정 운영의 모든 부문에서 부패를 엄격히 다스리고 투명성을 높임으로써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고, 무엇보다도 교육예산에 국민총생산(GNP)의 7% 이상을 투입함으로써 국민 개개인을 ‘일당백’의 수준으로 훈련시켜 놓은 것이 핀란드가 국가경쟁력에서 1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외교와 내정이 겹친 결과로 핀란드는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를 기록함으로써 이제 자신에게서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받아가던,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부당하게 압제하던 러시아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되고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필자가 마침 국회와 외무부의 지도자들과 함께 오찬을 나누던 때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 방송됐다. 그들은 모두 ‘실망’ 또는 ‘충격’이라고 반응하면서도, 관련당사국들이 모두 새로운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진상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이 과연 핵폭탄을 만든 것인지, 만들었다면 몇 개를 만든 것인지, 또 실전에 쓸 수 있을 정도의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선결이라고 역설했다.
그들은 북한의 핵보유 선언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응이었다. 설령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단히 조야(粗野)해서 미사일에 탑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한국정부가 우선 북한 핵개발의 진상과 선언 의도를 파악하는 데 힘쓰라고 권고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몇몇 국제문제연구소의 전문가들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들은 북한의 발표가 빚어낸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지적하면서도, 결국 외교적 해결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은 말할 것도 없고 전초단계로서의 경제봉쇄 역시 상황을 악화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 핀란드의 최대 일간지이면서 스칸디나비아의 최대 일간지인 ‘헬싱긴 사노마트(Helsingin Sanomat)’도 북한 문제를 이틀에 걸쳐 크게 보도하면서도 ‘신중한 대처’를 권고했다.
북한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핀란드의 해법이 한국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북한핵이 한국에 주는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따라서 북한핵은 완벽하게 폐기돼야 한다. 남과 북이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이다. 이렇게 과제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는 ‘핀란드 방식’의 외교에서 지혜를 빌릴 필요를 느낀다. 달리 말해, 성숙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는 지는, 또는 쥐 잡으려다가 독을 깨는 어리석은 행위가 관련당사국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저질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해치는 언행은 절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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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씨는 “세계의 모든 나라는 불안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불안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할 줄 아는 능력의 결여가 평화와 안전에 대해 가장 위험한 요소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북한을 포함한 모든 관련당사국들이 각각 자신만의 완전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역기능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핵무장으로 자신의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나머지 관련국들은 무력행사를 통해서라도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각자의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는 생각을 접어야 할 것이다.
김학준 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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