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현격한 시각차를 고려할 때 단기간 내에 회담 재개를 위한 여건이 조성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의 속내는?=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원인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함으로써 회담 참여에 필요한 명분을 축적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 10일 북한 외무성 성명에 대해 국제사회가 한결같이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북한의 핵 보유 선언 이후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여 5개국은 북한의 핵 보유 반대에 한목소리를 냈다.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는 5개국의 ‘공동전선(united front)’ 구축을 제안하기도 했다.
중국이 김 위원장에게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친서까지 전달하며 대화복귀를 설득한 만큼 김 위원장이 어느 정도 중국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건부로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고 밝혀 북핵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왼쪽부터)은 22일 각각 북핵 문제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밝혔다. 김경제 기자 |
▽한국정부의 평가 및 6자회담 재개 전망=정부는 지난해 11월 장 핑 유엔총회 의장의 방북, 지난달 커트 웰던 의원 등 미국 하원 의원단의 방북 때 북한이 밝힌 내용과 10일 북한외무성 성명 및 김 위원장의 발언을 종합 분석하면 일관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북한은 미국과의 공존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지만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부득불 억지력 차원에서 핵을 보유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통일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북한은 장 핑 의장에게 미국과의 공존을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웰던 의원에게는 6자회담 조기 개최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지만 미국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외무성 성명을 통해 국제적 관심을 끌어보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려대 북한학과 유호열(柳浩烈) 교수는 “외무성 성명에 비해 분위기는 훨씬 나아졌지만 북-미의 입장차가 쉽게 좁혀질 것 같지는 않다”며 “물밑 접촉을 통해 절충점을 찾는 과정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정부는?=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미 국무부 루 핀터 대변인은 “6자회담은 북한의 핵무기 추구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평화적인 외교를 통해 해결하고 북한의 국제적인 고립을 끝낼 최선의 방법”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으로 달라질 것이 전혀 없는 만큼 북한은 조건 없이 회담장에 나와야 하며, 불만이 있으면 회담의 틀 안에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미국은 일단 중국과의 외교채널을 통해 김 위원장이 왕자루이 부장에게 밝힌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분간 북한에 대해 핵을 포기하고, 6자회담에 복귀하도록 외교적 압박 전략을 계속하는 것 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앞서 미국은 19일 미일 외무·국방장관 회담에서도 북한이 무조건, 그리고 신속히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
▼김정일 “조건되면 6자회담 복귀” ▼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21일 “유관측(국)들 공동의 노력으로 6자회담의 조건이 성숙된다면 어느 때든지 회담 탁(테이블)에 나갈 것”이라며 “미국이 믿을 만한 성의를 보이고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2일 “김 위원장이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으로부터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구두 친서를 전달받았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은 6자회담에 대한 종전의 강경한 태도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것이지만 핵 문제에 대한 북-미 간의 견해차가 여전히 큰 만큼 회담의 조속한 재개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이 통신은 또 김 위원장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견지할 것이며 대화를 통하여 (핵 문제를)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6자회담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회담의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후 주석은 김 위원장에 대한 구두 친서에서 “중-북 쌍방이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입장을 견지하며 6자회담을 통해 핵 문제와 북측의 합리적인 우려를 해결하는 것이 중-북 쌍방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밝혔다.
한편 북한을 방문하고 이날 중국 베이징(北京)에 돌아온 왕 부장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는 조건들은 여러 당사자의 성의와 더 많은 행동”이라고 밝혔다.
왕 부장과 동행한 닝푸쿠이(寧賦魁) 한반도문제 담당 대사는 “상황이 여전히 아주 복잡하다”고 밝혀 6자회담 재개가 쉽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날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장관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10일 북한 외무성 성명은 6자회담 불참에 중심을 두었는데, 이번 김 위원장의 언급은 조건을 내걸었지만 회담 참가에 무게를 두고 있다. 긍정적 메시지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는 이날 오전 한국외국어대 총동문회 초청으로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행한 강연에서 “6자회담은 북한이 국제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그 첫 단계는 바로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베이징=황유성 특파원 yshwang@donga.com
▼김정일이 말한 ‘美의 믿을만한 성의와 행동’이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에게 6자회담 재개의 조건으로 제시한 ‘미국의 믿을 만한 성의와 행동’은 무엇일까.
북한 외무성이 10일 핵 보유 및 6자회담 무기한 불참을 선언하면서 “(미국의)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는 대통령 취임 연설과 연두교서 등을 통해 우리와는 절대 공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책화했다”고 밝힌 점에 비추어 북한은 미국의 대북 평화공존 선언을 기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 국제정책연구소 선임 연구원이 16일 한 포럼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평화 공존’이란 두 단어만 말하면 북핵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북한은 실제로는 부시 행정부의 단호한 태도에 비춰볼 때 ‘대북 적대시 정책’을 명시적으로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이 때문에 최근엔 ‘상징적 조치’라도 취해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북한이 지난해 6월 3차 6자회담에서 ‘핵 동결에 대한 보상’으로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을 요청하면서 “미국은 반드시 에너지 지원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북한이 이를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
북한은 특히 “핵 동결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북-미 간) 신뢰조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인”이며 “조건이 조성되면 핵 폐기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6자회담의 목표는 핵 동결이 아니라 폐기이며 북한의 요구는 ‘나쁜 행동에 대해 보상하라’는 것”이라며 핵동결에 대해 보상할 수 없다는 원칙적 자세를 지켜왔다. 따라서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이 ‘성의’를 보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