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분배에서 소외된 채 가난을 대물림한 빈곤층, 의무교육 혜택이 고작인 서민대중, 극우로부터 ‘불순분자’란 오명을 쓰고 희생된 분들, 독재에 항거해 수난 당한 분들이 영화를 독식한 보수 진영을 몰아붙인다면 그 억하심정에 이해가 간다. 하지만 고등교육 혜택을 받고 안정된 직장에 정착한 진보 진영의 일부 학자들이 정부의 ‘과거사 진실규명’에 편승해 이분법적 편 가르기 식 주장을 펴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선과 악 공유하는 존재▼
선거 때만 되면 누구나 외쳤듯 지역감정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마당에 진보냐 보수냐, 선 긋고 줄을 서라니 많은 중도 성향들은 어느 줄로도 설 수 없어 망설이게 된다. 점령군이 들어와 편 갈라 줄을 세울 때 점령군 병사의 친인척이 선 줄에 끼지 못하면 몰매 맞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곤경은 전쟁을 겪어본 세대면 실감한다. 어떤 사안을 접할 때 진보 측 주장에 박수를 보내다가, 어떤 사안은 너무 편파적이지 않나 걱정스레 지켜볼 때도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그런 양면성이 공존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당대를 초월한 인류의 영원한 고전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 구성원과 등장인물을 보면 악의 분신인, 탐욕스러운 부친 표도르, 광기 든 방종한 장남 드미트리, 냉철한 이론가 차남 이반, 열등의식에 찬 사생아 스메리자코프, 순진무구한 막내둥이 알료샤, 그 외 술집 여자 그루쟁카, 조시마 장로 등으로, 그들의 다양한 성격은 인간세계의 축소판이고, 작가가 한 인간의 성격을 추적할 때도 주변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굴절을 겪는 심리묘사야말로 압권이다.
술에 취해 펑펑 울며 애송시를 읊는 표도르나 무지한 친부 살해범 스메리자코프의 내면심리를 따라갈 때 독자가 그들을 끝까지 증오할 수 없듯,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파악하지 않았다. 불안전한 존재인 인간의 내면이야말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인간의 마음속에는 성스러움과 추악함, 도덕적인 면과 비윤리적인 면, 선과 악이 공존하여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을 평가할 때도 예의를 갖춰야 하며 한쪽 면에만 확대경을 들이대 이분법적으로 재단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박정희의 유령을 불러내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게 한창이다. 때가 때인 만큼, 그가 도마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군사 쿠데타의 주역, 극우 반공 독재자, 유신통치와 인권탄압 등 그가 남긴 허물은 치욕적이다. 필자 역시 ‘인혁당사건’을 소설화하며 그의 인권탄압을 응징했다. 그러나 박정희란 인간을 한쪽 측면만 보아서는 올바른 평가라 할 수 없다. 강직함이 지나치면 부러진다는 옛말대로 그의 말년이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강직한 추진력이 오늘의 조국을 근대화시켰다. 그 공은 진보 진영이 아무리 폄훼해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고, 그들이 추키는 민중 다수도 그렇게 평가한다.
▼박정희 그리고 이광수 서정주▼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서정주의 친일문제도 그런 관점에서 본다. 인정해야 할 과실은 준엄하게 짚되, 그분들이 남긴 문학적 유산은 그 공적만큼 평가해야 옳다. 대학 신입생 필독 도서목록에 빠지지 않는 ‘무정’을 뺀다면 오늘의 우리 문학은 아비 내치는 자식 격이요, 서정주 시를 빼고 우리 근대시를 논함은 목차의 주요 대목을 들어내는 꼴이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남루한 행적에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깨닫고, 기려야 할 점을 높여주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허물없는 인간이 없듯 “비판만이 능사가 아니니 너희도 언젠가 비판당할 것이다.”
김원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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