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꿈이냐 생시냐.”
지난달 28일 오후 11시경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이 법사위에서 통과된 뒤 열린우리당 유승희(兪承希) 의원과 한나라당 진수희(陳壽姬) 의원이 뜨겁게 포옹했다. 열린우리당 이경숙(李景淑), 한나라당 김애실(金愛實) 이계경(李啓卿) 의원도 여성단체 인사들과 얼싸안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 여성 의원은 “50년 만에 숙원을 풀었다”며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여성, 정치의 주역으로”=지난해 말 법사위 법안심사소위 회의장에서도 한나라당 ‘여성 3인방’과 열린우리당 여성 의원들이 민법개정안 처리에 소극적인 법사위 소속 남성 의원들 뒤편에 자리 잡고 앉아 ‘시위’를 벌였다. 회의실은 여야 여성 의원 및 20여 명의 여성단체 인사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법사위 소속의 남성 의원들은 이들의 집요한 압박과 설득에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여야 여성 국회의원의 수는 40명. 15대 4.0%, 16대 7.7%에 이어 17대 국회에서 전체 의석 중 13.4%를 여성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여성 의원 비율도 이슬람국가 수준이던 세계 101위에서 62위로 39계단이나 수직 상승했다. 여성 의원들 사이에서는 “교섭단체를 두 개나 만들 수 있다”는 농담도 나왔다. 더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는 여성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 특히 여성들의 기피 대상이었던 지역구 출마자의 경우 16명으로 늘었고 지역구에서 당선된 여성도 17대 들어 처음으로 두 자릿수(10명)를 넘어섰다.
여성들이 차지하는 국회 내 비중과 위상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니라 ‘절반’을 당당히 요구하는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 열린우리당에서 당의장 선거에 출마한 한명숙(韓明淑) 의원, 민주노동당 김혜경(金惠敬) 대표가 여야 ‘여성 파워’를 입증하고 있다. 또 김현미(金賢美) 전여옥(田麗玉) 의원 등 여야의 ‘입’은 물론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등 4당 비례대표 1번도 여성이다.
여성의 힘은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국회 의원식당에서는 여야 남녀 의원 81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회 양성평등 포럼’ 창립식이 열렸다. 이들은 △여성 차별적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개발 △여성정책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형성 △여성 국회의원 비율 50%까지 확대 노력 등을 골자로 한 ‘행동강령’도 채택했다.
▽“여성 대통령, 가능한가”=“한국에서도 곧 여성 대통령이나 총리가 등장할 것이다.”
지난해 유엔지위위원회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던 지은희(池銀姬) 당시 여성부 장관이 특파원 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200년이 넘는 미국 정치사에서도 등장한 적이 없는 여성 대통령의 탄생 가능성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2월 23일 오전 열린우리당 여성 의원 18명 중 16명이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 은밀히 모였다. 전당대회에 출마하는 한명숙 의원을 당의장에 당선시키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서 여성 의원들은 “전당대회에서 반드시 1표는 한 의원을 찍고 나머지 1표는 다른 지지 후보를 찍자”고 결의했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의 기세도 꺾일 줄 모르고 있다. 회원 7만 명에 육박하는 ‘박사모’는 2007년 대통령선거를 겨냥해 ‘10만 양병론’을 주창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한나라당 외곽에 머물지 않고 당에 진입해 각종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기로 했다.
정당의 상부구조뿐만 아니라 기간당원을 중심으로 한 하부구조도 양성 평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만을 넘어선 열린우리당 기간당원 중 여성의 비율은 4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2007년 대통령후보 경선에 참여할 대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여성 대통령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도 있다. 열린우리당 김영주(金榮珠) 의원은 “몇몇 눈에 띄는 여성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인기도 중요하지만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반 다지기, 즉 여성 인적자원의 확대와 각계 여성 전문가들의 양성이 더 시급하다”고 말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최호원 기자 bestiger@donga.com
▼외국의 여성 ‘코드1’▼
세계적으로 ‘여성 최고 정치지도자’는 더 이상 생소한 존재가 아니다.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 총리, 핀란드의 타르야 카리나 할로넨 대통령 등 현역 정치 지도자도 많고,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처럼 거대한 족적을 남긴 전직 행정수반들도 있다.
여성 정치지도자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철(鐵)의 여인’ 대처 전 총리다. 1979년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그는 1990년까지 집권해 영국 역사상 최장기 총리로 이름을 올렸다.
백혈병과 싸워가며 건국 직후의 이스라엘을 이끌어간 골다 메이어 전 총리나 1990년 아일랜드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메리 로빈슨도 역사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 아일랜드는 1997년 인권운동을 위해 자진 사임한 로빈슨 대통령의 뒤를 이어 역시 여성인 메리 매컬리스 대통령을 선택했다.
뉴질랜드는 클라크 총리, 시안 엘리어스 대법원장, 마거릿 윌슨 의회 의장 등 3부를 모두 여성이 장악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인디라 간디 전 총리가 1966∼77년, 1980∼84년 두 차례 총리를 역임했고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1960∼65년, 1970∼77년, 1994∼2000년 등 3차례 총리 직에 올랐다. 인도의 간디 전 총리의 며느리인 소냐 간디는 지난해 국민회의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했으나 총리 직은 고사했다.
미국에서는 아직 여성 대통령이 없으나 민주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밀자는 움직임도 있다.
일본에서 여성 총리가 탄생한다면 4선의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 가장 유력하다는 평.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여성 총리가 나올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치와 무관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남성에게만 왕위 계승권을 인정해 온 규정을 바꿔 여왕도 나올 수 있게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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